by ReviwerX 클레어
여전히 갇혀있는, 뮤지컬 <난설>
최근 몇 년간 여성에 대한 논의는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대중서사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한다. 드라마에서 남여 클리셰는 전복되었고 영화에서는 여성 투탑 수사물이 제작되었다. 사회 흐름에 가장 늦게 반응하는 장르인 뮤지컬에조차 이러한 움직임이 보인다. 젠더 프리 공연은 더이상 새롭지 않고 라이센스 대극장 뮤지컬에서는 불편한 장면들이 사라지거나 축소되고 있다.
뮤지컬 <난설>의 제작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힌다. 현모양처의 상징인 신사임당과 미의 상징인 황진이와 달리 허난설헌은 훌륭한 시인이고 훌륭하지 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거대한 재능을 가졌으나 시대에 갇혀 불행한 일생을 보냈다. 지금 시대에서 창작 뮤지컬이 허난설헌을 다룬다는 것은 의미 있는 시도이다.
다만 뮤지컬 <난설>의 창작자들은 여성 서사의 관점으로 뮤지컬 <난설>을 제작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창작자들은 여성으로서의 허난설헌의 고통보다는 시인 허난설헌의 아름다운 시에 주목한다는 창작 의도를 밝혔다. 시대 흐름이 이렇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여성 서사에 집중할 필요는 없다. 작품의 의도가 여성 서사가 아니라 허난설헌의 아름다운 시의 무대화라면, 그것을 충실히 구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뮤지컬 <난설>에서 시인 허난설헌과 그녀의 시가 잘 다뤄졌을까?
삶과 닿지 못한 시
창작자는 허난설헌의 시의 아름다움을 무대로 옮기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연 초반에 허난설헌의 다양한 시가 무대에서 노래된다. 장면과 장면 사이에 시가 불리고, 각 장면들은 시를 사이에 넣기 위해 시에 등장하는 설정들로 구체화된다. 거문고가 나오는 견흥을 불러야 하기 때문에 거문고를 이야기하고, 시에 신풍주가 나오기 때문에 신풍주를 이야기하며, 유선사를 부르기 위해 뜬금없이 신선 이야기를 하는 식이다. 시를 노래할 때는 시의 뜻으로 한번 노래하고, 음차로 한번 노래하고, 바닥에는 친절하게 한문을 쏘기까지 한다. 이래도 허난설헌의 시가 아름답지 않아? 라고 외치는 모양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 감흥이 오지 않는다.
시는 표상이고 시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시인의 일생이다. 어떤 시는 시인의 삶과 함께 봤을 때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허난설헌의 시어가 아름다운 이유 또한 시대상에 갇혀 불행한 삶을 산 그녀의 인생과 대조되기 때문이다. 뮤지컬 <난설>에서는 허난설헌의 시어가 넘버로 옮겨지지만, 허난설헌의 인생과 접하지 못한 시어는 그저 흔한 아름다운 단어의 나열에 불과하다.
허난설헌은 평생 조선에 태어난 한, 여자로 태어난 한, 김성립의 아내가 된 한의 삼한을 토로했다. 그녀의 가장 유명한 시인 <규원가>에는 이러한 세상을 향한 원망이 담겨있으나 규원가는 극에서 절대 불리지 않는다. 뮤지컬 <난설>에서 허난설헌의 시는 그저 행복하고 아름다운 순간에만 배경음악처럼 사용된다. 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는 것과 아름다운 시를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시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면서 정말로 단어와 내용이 아름다운 시만 무대에 늘어놓으니, 그녀의 삶과 닿지 못한 시는 피상적인 아름다움만 남기고 공허하게 흩어진다.
여성 인물을 다루는 최소한의 책임감
작품의 의도가 여성 서사의 주목이 아니라고 해도, 지금 같은 시대에서 여성 인물을 다루는 작품은 여성 서사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뮤지컬 <난설>은 시대 흐름과 역행하는 여성 서사를 보여준다. 흔하게 행해지는 여성 차별의 대표적 예시로, "대상화"와 "대신 말하기"가 있다. 뮤지컬 <난설>은 충실하게 이 두 가지를 재현한다.
뮤지컬 <난설>에서 허난설헌은 남성들을 위한 도구로 대상화된다. 그녀는 주인공이지만 주인공이 아니다. 꽤 오랫동안 뮤지컬, 특히 대극장 뮤지컬에서 다뤄지는 여성은 성녀 아니면 창녀의 이분법을 따랐다.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의 엠마나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줄리아처럼 성녀의 포지션에 위치한 여성은 남성들의 모든 멍청함을 포용하는 하나의 이상향처럼 존재한다. 남성의 서사를 전개하기 위해 여성은 선의 상징으로 대상화된다. 여성의 존재 의의는 남성의 감정적 필요에 의한 것이고, 남성의 시선에서 여성을 바라볼 뿐 여성은 독립된 사람으로서의 존재감을 나타내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뮤지컬 <난설>에서조차 허난설헌은 대상화된다. 착하고 선하고 다정한 그녀는 방에 갇혀 있던 허균을 밖으로 꺼내주고 서얼 출신의 이달의 한과 숨은 뜻을 공감해주지만, 본인의 여자로서의 한계에 대하여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그녀는 벽서를 붙이며 세상과 싸우지만 그 또한 본인을 위한 싸움이라기보단 다른 사람들을 위한 행동이다. 극은 여자라서 비극적인 일생을 산 허난설헌의 삶보다는 허난설헌으로 인해 치유된 남자들의 이야기에 더 집중한다. 그저 선하고 다정하고 아름다웠던 여성이라는 틀로 허난설헌을 가두고, 여성으로서의 한계에 대해 치열하게 저항했던 허난설헌을 지운다.
게다가, 허난설헌의 이야기는 이달과 허균에 의해 "대신 말해"진다. 뮤지컬 <난설>에서 허난설헌의 목소리는 결코 들을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이야기는 허균이나 이달의 목소리로만 전해진다. 남성들의 시선으로 회상하는 허난설헌은 허난설헌 자체가 아니라 허균의 누나이자 이달의 연인으로 존재한다. 누나나 연인이 아닌 한 명의 시인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했던 사람의 이야기는 희미하다. 관객은 이달과 허균에게 허난설헌이 얼마나 특별했는지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녀의 삶에서 스스로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시를 쓰고 살았는지를 알고 싶을 뿐인데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여자가 설 자리 없던 뮤지컬 시장에, 최근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이 다수 제작되고 있다. 세상의 변화와 관객의 목소리에 제작자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변화가 막 시작되려 하는 과도기이다. 이러한 과도기에 하나의 잘못된 작품은 자기 자신은 뿐만 아니라, 앞으로 제작될 수 있는 많은 여성 주인공 뮤지컬의 싹을 자를 수 있다. 그래서 지금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들은 여성 서사와 완성도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진일보한 여성 서사를 다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퇴행이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여성 서사에 대해 배우도 고민하고, 관객도 고민한다. 그렇다면, 창작자들도 다시 한번 고민해보기를 청한다. 어느 배우의 인터뷰처럼, 언젠가는 환상 속 허난설헌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치열하게 저항했던 진짜 허난설헌을 다룬 극을 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