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번째 책) 권여선, 『레몬』, 창비(2019)
여기 외면하고픈 진실이 있다. 세상은 가혹하고 생은 고통일 뿐이라는, 오직 우연과 절망으로만 삶이 구성된다는, 그런 진실. 가령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부터 푼돈을 벌며 학교에 다니고, 열아홉 살에 억울한 살인 누명을 써 경찰에게 매를 맞고 이웃에게 손가락질 받고 학교에서도 쫓겨났다가, 군대에 가서는 육종에 걸려 다리를 절단하고 불구의 몸이 되어 전역해서는, 세탁 공장에 겨우 취직해 화상을 입어 가면서까지 다림질을 하며 가까스로 살아가지만 결국 육종이 폐까지 번져 서른 살에 죽는, 소설 속의 '한만우'와 같은 인간이 과연 소설 속에만 존재할 뿐이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세상의 모든 '한만우'들 앞에서, 그래도 삶은 살 만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며 신께서 늘 우리를 보살핀다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도대체 그래도 되는 걸까.
믿고 싶은데…… 믿을 수가 없어요.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신을 믿을 수 있어요?
(…)
이를테면, 이 지구상 어딘가에 한 여자아이가 태어난다. 아이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늘 굶주리고 매를 맞고 쓰레기를 뒤지다 질병에 걸리고 눈이 먼다. 열두살 때 아이는 집단으로 강간을 당한 후 칼로 난자되어 살해된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동안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쓰레기장에 버려진다. 그런데도 신을 믿을 수가 있나?
-185면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은 대답하기 곤란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삶이라는, 영원히 답하지 못할 질문 앞에 우리는 무력하고 이 소설도 무력하다. 『레몬』에서는 그 누구의 삶도 비극 아닌 것이 없다. 가능한 것은 이 지독한 불행 앞에서 슬퍼하는 일뿐이라는 듯, 소설은 그저 인물들의 비정한 삶을 한 사람의 것도 빠뜨리는 일 없이 공평하게 옮겨 놓을 뿐이다. 이들의 삶은 도저히 일반적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특수한 상황(예컨대 언니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살해당하거나, 베이비시터가 잠깐 한눈판 사이 아이가 유괴되거나…)에 놓이면서 순식간에 참혹한 비극의 현장이 된다. 그러나 소설보다 더 악랄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나. 그리고 그런 일이 나에게는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면, 인물들의 비극은 특수한 것이 아니라 어떤 근본적인 보편의 영역에 있는 게 아닐까. 요컨대 '비극적인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이라는 비극'을 말하는 것이다.
답답하다. 그런데 그래서 어떡하란 말인가. 삶이라는 근본적인 비극 앞에서 우린 뭘 할 수 있고 또 뭘 해야만 할까. 앞서 '영원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라 말했지만, 답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가능한 답이 무한히 많기 때문에 영원히 대답해도 부족한 것이다. 권여선은 그 무한한 대답 중 한 가지를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그럼 언니, 하고 다언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신은 안 믿어도 시는요, 하고 물었다. 시는 믿죠?"(188면) 신을 믿을 수 없으니 시를 믿겠다는 저 말이 나는 왠지 실없어 보이지만은 않는다. 누구나 답답한 세상을 살아갈 자기만의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신을 믿나. 신을 믿을 수 없다면 우린 무얼 믿을까. 분명한 건, 영원히 대답해도 모자랄 거라는 점이다.
07.1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