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평연습 Oct 10. 2022

사랑하는 자는 무릎이 꺾이는 자.

#79번째 책) 박연준, 『소란』, 난다(2020)


ㅡ 고등학교 때 한 선생님께서 세상 모든 꿈은 악몽이라고 농담처럼 말씀하셨던 걸 기억한다. 나쁜 꿈을 꾸면 나쁜 꿈이니까 당연히 기분이 안 좋고, 좋은 꿈을 꿔도 그건 결국 꿈이니까 기분이 안 좋다고, 그러니까 꿈이라는 건 꾸지 않는 게 제일이라던, 듣다 보니 묘하게 설득되던 그 말을 기억한다. 그 기억을 끄집어낸 것은 박연준의 다음 문장 때문이었다.


아파하는 정도가 커지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까봐 겁났고, 아파하는 정도가 잦아들면 언제 다시 아픔이 커질지 몰라 불안했다.

-36면, 「당신이 아프다」 중


ㅡ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당신의 심정은 희망과 불안 중에 언제나 불안만을 향한다. 증세가 악화되면 당연히 불안하고, 증세가 호전돼도 언제 또 재발할지 몰라 역시나 불안한, 그러니까 이래도 저래도 사랑하는 이의 병(病) 앞에서 당신은 불안해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좋은 꿈도 나쁜 꿈도 결국엔 다 악몽이듯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병 앞에선 모두 흉조로 해석되고 만다.


아픈 사람을 보고 있는 일은 생로병사란 비밀이 담긴(비밀만도 아닌 비밀) 밀주 한잔을 마시는 일이다. 언제까지 마시느냐, 아픈 사람이 다 나을 때까지 마셔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죽는 날까지 계속 아플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그 사람을 대할 때만큼은 내내, '무거운' 잔을 내려놓을 수 없다.

-36면, 「당신이 아프다」 중


ㅡ 때문에 아픈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란 그야말로 아픈 일일 수밖에 없는데, 그 아픔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생로병사의 비밀이 담긴 밀주 한잔을 마시는 일". 내가 아픈 것도 아닌데, 남이 아픈 것을 보는 일이 마치 독배를 드는 일에 비견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깊지 않다면 희망을 말하기가 비교적 쉽겠지만(금방 나을 거예요, 걱정 마요) 사랑이 너무 깊다면 성큼성큼 자라나는 불안을 막기 힘들다(죽으면 안 돼요, 제발). 시인은 그것을 또 이렇게 표현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면 심장이 쪼그라든다. 사랑하는 자는 무릎을 꿇는 자가 아니라, 무릎이 꺾이는 자다.

-37면, 「당신이 아프다」 중


ㅡ 시인의 말대로, 먼 훗날 누군가 많이 아파 내 무릎이 꺾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 혹시 나는 박연준의 문장을 떠올리지 않을까. 다시 한번 그가 말한다. "병은 이겨내야 할 게 아니라 지혜롭게 겪다,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다음 새로워지는 것은 선물 같은 일."(38면)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시절 그 선생님의 말에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좋은 꿈을 꾸면 좋은 꿈이니까 당연히 기분이 좋고, 나쁜 꿈을 꿔도 그건 결국 꿈이니까 다행이라고, 그러니까 어떤 꿈이든 모두 선물 같은 일이라고. 그러니 사랑하는 자는 무릎이 꺾이는 자라는 박연준의 문장에 부사 하나를 추가하자. 사랑하는 자는 '기꺼이' 무릎이 꺾이는 자다.



10.10.22

작가의 이전글 언어 슬랩스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