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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Oct 26. 2022

시(詩)라는 성인식

서정주,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ㅡ 미당 서정주가 생전에 낸 열다섯 권의 시집 중 100편을 뽑은 시선집이다. 좋은 시가 많지만 한 편만 뽑아 자세히 읽어보려 한다. 이번에 쓸 글은 「바다」에 관한 것이다.


귀 기울여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 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 데도 없다.

아- 반딧불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
울음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 속에 숨기어 가지고…… 너는,
無言의 海心에 홀로 타오르는
한낱 꽃 같은 心臟으로 침몰하라.

아- 스스로히 푸르른 정열에 넘쳐
둥그런 하늘을 이고 웅얼거리는 바다, 바다의 깊이 우에
네 구멍 뚫린 피리를 불고…… 청년아.

애비를 잊어버려
에미를 잊어버려
형제와 친척과 동무를 잊어버려,
마지막 네 계집을 잊어버려,

아라스카로 가라 아니 아라비아로 가라 아니 아메리카로 가라 아니 아프리카로 가라 아니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
오-어지러운 심장의 무게 우에 풀잎처럼 흩날리는 머리칼을 달고
이리도 괴로운 나는 어찌 끝끝내 바다에 그득해야 하는가.

눈 떠라. 사랑하는 눈을 떠라…… 청년아,
산 바다의 어느 동서남북으로도
밤과 피에 젖은 국토가 있다.

아라스카로 가라!
아라비아로 가라!
아메리카로 가라!
아프리카로 가라!

「바다」 전문




1. “눈 떠라”


ㅡ 서정주의 「바다」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귀 기울여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이 문장은 왜 이렇게 어색한가. 화자는 바다라는 텅 빈 공간에 유일하게 홀로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저와 같이 표현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자. 다른 모든 것이 부재하는 와중에 독단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무언가를 표현할 때, 우리는 ‘아무리 보아도 ~뿐’이라 말하지 ‘아무리 들어도 ~뿐’이라 말하지 않는다. 즉 저와 같은 상황에서 시각에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청각에 의존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눈을 씻고 보아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이라 했어야 자연스러웠을 저 첫 행에서, 그는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귀를 연다. 아무리 “귀 기울여도” 이곳에는 바다와 나뿐이라고 말하며.

ㅡ 비슷한 예는 또 있다.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이하 「무슨 꽃으로」)에서 삶이 힘겨울 때마다 “고향을 생각한다”고 고백하는 화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옛날의 모습들. 안개와 같이 스러진 것들의 형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이제 그 “형상”들이 열거될 차례. 그런데 보라, 2연에서 “귓가에 와서 아스라이 속삭이고는, 스쳐가는 소리들”, 3연에서 “다만 느끼는 건 너이들의 숨소리”, 4연에서 “소녀여 뭐라고 내게 말하였든 것인가?”, 6연에서 “하늘 우에선 아득한 고동소리”. 이어지는 내용은 “형상”이 아니라 온갖 “소리”의 향연이다. 화자는 분명 고향의 “형상”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하고는 실제로는 들려오는 소리만을 받아 적고 있다. 그가 말한 “형상”이란 모양과 생김새가 아닌 소리로만 구성되는가. 그렇다면 그는 시각이 아니라 청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셈이다.

ㅡ 왜 눈이 아니고 귀인가. 이에 대답하기에 앞서 「바다」로 돌아와 제2행을 보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 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한다는 표현은 그만큼 무수한 시간이 흘러 지나간다는 의미일 텐데, 우리는 여기서 왜 하필이면 “밤”이 왕래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낮’은 없고 “밤”뿐이다. 낮과 밤이 교차되며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밤과 밤과 또 다른 밤만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화자는 낮에서 밤으로가 아니라 이 밤에서 저 밤으로 왕래하며 오직 밤 속에서만 살고 있다는 듯 말한다. 그의 말대로 삶이란 어둡고 아득한 “밤”일뿐이라면, 이제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겠다. 왜 그가 세상을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귀로 들어야 하는지. 이 어두운 세상에서 시각은 청각보다 신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눈을 뜨지 못하는 게 아니다. 어두운 밤이 그의 눈을 쓸모없게 만든 것이다.

ㅡ 밤 속의 “나”는 2연에서 말하듯 “반딧불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 맹인처럼 방황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가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하고, 이것은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 데도 없다”는 역설적 상황으로 나타난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 필요한 것은 아마 “불”일 것이다. 청년의 눈이 앞을 볼 수 있도록 길을 밝혀 줄 불. 그런데 6연의 첫 행을 보라. “눈 떠라. 사랑하는 눈을 떠라…… 청년아”. 화자는 “청년”이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마치 눈을 감는 것이 그의 의지라는 듯 말하는 저 명령조의 “눈 떠라”는 분명 이상하다. “밤”이 너무나 어두워서 보지 못하는 게 아니었던가?

ㅡ 의문에 힌트가 될 만한 내용을 다른 시 「문」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시의 1연은 꽤 격정적이다, “밤에 홀로 눈뜨는” 일이 무서운 일이고 괴로운 일이고 위태로운 일이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토로한다. 이때 저 진술은 앞선 우리의 견해와 치명적으로 상충된다. 세상을 눈이 아니라 귀로 인식하는 화자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했던가. 세상이 “밤”이기 때문이라고, “등불 하나도 없”이 어둡기 때문이라고, 그가 눈을 뜬다 해도 아무것도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해하지 않았나. 그런데 저 진술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가 눈을 뜨지 않는 게 아니라 뜨지 ‘못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밤에 홀로 눈 뜨는 일이 그에게 ‘무섭고 괴롭고 위태로운’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

ㅡ 그렇다면 화자의 ‘청각 의존성’은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는 현재 밤이라서 어쩔 수 없이 앞을 못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제 의지에 따라 눈을 감는 ‘선택’을 한 것이다.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눈을 감았고, 대신 귀로 듣기를 택한 것이다. 어떤 이유로? 서정주의 초기 시 세계는 「자화상」에 응축되어 있다고들 한다. 그 시에서 화자가 자신을 “죄인”이라 불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라고 말할 때의 저 ‘부끄러워하는 자아’. 죄의식의 근원을 자아의 성적 욕망에서 찾을 수도, 아니면 다른 곳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슨 죄를 저질렀고 어떤 트라우마를 겪고 있든, 그가 현재의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ㅡ 이때 「문」의 4연에서 “뉘우치지 않는 사람”이 등장한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사람은 “소녀와 같은 눈동자를 그득이 뜨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눈 감은’ 화자와 매우 대조적이다. 즉 눈을 감는 행위는 자신의 죄를 알고 깊이 통감하는 이가 취하는 자세다. 언제나 죄인은 눈을 감는다. 그것은 자신을 질책하는 타인의 눈빛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제 눈빛에서 부끄러움을 들키지 않으려는 방편이기도 할 것이다. 「자화상」 속 부끄러워하는 자아는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라 말했다. 결국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니라 “눈”이라는 얘기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눈을 보면 죄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것. 오직 “눈”만은 부끄러움을 숨길 줄 몰라서, 그의 “눈에서” 우리가 “죄인을 읽고 가”는 것이다.

ㅡ 이제 우리는 앞서 물었던 질문에 다시 대답해야 한다. 왜 눈이 아니고 귀인가. “밤”이 어두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답했지만, 「문」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대답해야 옳지 않을까. 자신의 죄가 부끄럽고 그것을 뉘우치느라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고. “소녀와 같은 눈동자를 그득이” 뜰 수 있는 자는 오직 둘뿐이다. 죄를 짓지 않았거나, 죄를 지었어도 조금의 뉘우침이 없거나. 우리의 화자는 둘 다 아니다. 죄를 지었고,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있으니, 그는 “소녀와 같은 눈동자”를 가질 수 없다. 그는 다만 죄인의 눈을 가졌다. 그러니 그 부끄러운 눈을 차라리 감고 숨길 수밖에.

ㅡ 그러나 제 죄가 부끄러워 눈을 감는 행위란 그 죄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얼마나 거리가 먼가. 죄의식을 갖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이 우선은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한 인간이 자신의 죄에 함몰되어 타락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당하고 극복해 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와 필히 대면해야 할 것이다. 부끄러움을 숨기는 것이 아니고 그 부끄러움과 마주 보는 일. 그러니 죄 앞에 눈을 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을 떠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죄 앞에서 “눈뜨는” 일이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문」 속 화자에 따르면 “밤에 홀로 눈뜨는 건” 무섭고 괴롭고 위태로운 일이라 하지 않았나. 그러나 2연을 보라. 그것은 또한 “아름다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죄인은 눈을 뜨고 자신의 죄를 정면으로 바라봄으로써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자세를 갖춘다. 이것을 화자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부른다.

ㅡ 「문」의 마지막 행, “비장한 네 형극의 문이 운다”에서 “문”이란 시어는 단 한 번 등장한다. 여기서 “문이 운다”라는 이상한 표현이 먼저 눈길을 끈다. 동사 “운다”는 명사 “문”(門)이 아니라 차라리 “눈”(眼)과 호응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앞의 “홀로 눈뜨는” 혹은 “눈동자를 그득이 뜨고”와 같은 구절을 고려했을 때도 그렇다. “눈”이 나와야 할 자리에 “문”이 나왔다. 이를 이렇게 이해하는 건 어떨까. “눈”이 흘려야 할 눈물을 “문”이 대신 흘리면서 이 시는 ‘눈=문’이라는 언어 유희적 상징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게 이해하면 ‘눈을 뜨는 일’을 ‘문을 여는 일’로 치환할 수도 있다. 「무슨 꽃으로」의 4연을 보면 “오늘도 굳이 닫힌 내 전정의 석문 앞에서”라는 구절에서 ‘닫힌 문’의 상징이 등장한다. 화자의 앞길을 막고 있는 육중한 돌문은 서정주의 다른 시 「벽」을 연상케도 하는데, “석문”이든 “벽”이든 그것은 폐쇄된 자아의 극복 대상이 아닌가. 열어젖히거나 깨부수고 나와야 할 대상인 것이다.

ㅡ 그러한 ‘닫힌 문’의 상징이 잘 나타난 다른 시가 있다. 「꽃밭의 독백」에서 시인은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사소(娑蘇)”의 목소리를 빌려 꽃에 말을 건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 이때 꽃은 지상의 존재 중 유일하게 “개벽”하는 존재, 새로운 세상을 열 잠재력을 가진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꽃이 언제나 그 “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닌데, “아이와 같이/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를 보면 알 수 있다. 이어지는 행에서 화자는 “닫힌 문”에 기대어 외친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두 번씩이나 거듭 외치며 ‘문을 열라’고 부르짖는 저 모습에서 간절함이 보인다. 저 간절한 개방의 의지는, 눈 감은 죄인이 아니라 차라리 닫힌 문을 열고 나가려는, 눈 뜬 회심자의 모습이 아닌가.

ㅡ 이렇게 ‘문을 연다’가 ‘눈을 뜬다’와 겹치면서 개방의 의지는 회개의 의지로 탈바꿈한다. 그렇기에 닫힌 문을 여는(감은 눈을 뜨는) 일이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다, 「문」의 마지막 행에서 “문”이 왜 우는지. 비로소 문이 열리면서(눈이 뜨이면서) 아름다운 회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문”(눈)이 흘리는 눈물은 한 죄인이 흘리는 아름다운 참회의 눈물이다. 눈을 떠야 눈물이 흘러나올 수 있듯이, 제 안의 죄의식과 부끄러움의 세계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밤에 홀로 눈뜨는” 일이 아니겠는가.

ㅡ 다시 「바다」로 돌아오자. 지금까지 서술한 바에 의하면, “눈 떠라”라는 명령은 더 이상 숨지 말고 자신의 죄 앞에 당당하게 서라는 명령이다. 그 명령은 과거의 죄를 받아들이고 책임져야 하는 죄인의 사명이다. 부끄러움에 차마 눈을 뜰 수 없어 귀로만 겨우 듣던 청년. 저 “눈 떠라” 속에는 그가 청각적 자아에서 시각적 자아로 깨어나길 바라는 심정이 담겨 있다. 반복하자면 그가 눈을 뜨고 자신의 죄와 대면하여 참회하기를 바라는 심정이. “눈 떠라. 사랑하는 눈을 떠라…… 청년아,” 눈을 뜨라고 두 번 반복되는 저 외침은 「꽃밭의 독백」에서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라는 두 번의 부르짖음과 얼마나 흡사한가. 눈을 뜨는 것이 문을 여는 것이라는 「문」의 수사법을 빌려 말하건대, 죄인이 비로소 ‘눈을 뜨고’ 죄를 마주하는 순간, 그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으로 점철된 과거의 세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게 될 것이다.



2. “침몰하라”


ㅡ 아직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있다. 시 「바다」에는 두 가지 명령이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눈 떠라”이고 이제부터 이야기할 다른 하나는 “침몰하라”이다. 2연을 보자. “한낱 꽃 같은 심장으로 침몰하라.”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화자에게 “침몰”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오히려 애써 이루어야 할 목적이 되고 있다. 이 이상한 명령은 심지어 4연에서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의 격정적 반복으로 극대화되고 있다. “침몰”은 어째서 좌절과 실패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달성해야 할 과제로서 “청년” 앞에 주어지는가. 여기에 대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그 침몰의 장소, “바다”의 의미를 떠올려야 할 것이다.

ㅡ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부끄러워하는 자아’를 고려할 때, “바다”는 어쩌면 죄의식의 공간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화자가 감당할 길 없는 ‘죄의식의 바다’에 빠져 길을 잃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바다”의 의미를 그렇게 이해하는 순간 “침몰하라”를 설명하기가 난감해진다. 왜 청년에게 죄의식의 바다에 침몰하여 더 깊은 죄의식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하겠는가. 그것은 “눈 떠라”의 의미와 정반대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서정주의 시 세계에서 “바다”란 어떤 공간일까(공간이어야 할까).

ㅡ 다시 한번 「자화상」을 보자. 1연의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에서 “바다”라는 시어가 등장한다. 이를 보면 아마도 “나”의 외할아버지에게 바다와 관련된 어떤 사연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사연의 자세한 내막이 「해일」이라는 시에서 상술되고 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 다니시던 어부로, 내가 생겨나기 전 어느 해 겨울의 모진 바람에 어느 바다에선지 휘말려 빠져버리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로”. 그러니까 어부였던 그의 외할아버지는 과거 바다에서 실종되어 돌아가셨던 것이다. 그때 어린 화자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바다는, 사람이 죽는 곳이구나.

ㅡ 해일이 일어 바닷물이 집까지 들이치던 어느 날. 화자는 당시 외할머니가 “얼굴이 엷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 쪽만 멍하니 넘어다보고 서 있었”다고 회상한다. 당시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며, 화자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 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었던 것이겠지요.” 외할머니는 바닷물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순간 그 모습을 죽은 남편이 집에 돌아온다는 상상으로 치환했을 것이다. 때문에 그 바닷물은 그냥 바닷물이 아니라 “남편의 바닷물”이다. 바다에서 죽은 남편이 바다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는 상상은, 그것이 비록 환상일지언정 외할머니에게 찰나의 황홀경을 선사했을 것이고, 그 때문에 당신의 얼굴은 “붉어져” 상기되고 말았을 것이다. 당시를 떠올리며 화자는 이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바다는, 사람이 재생하는 곳이구나.

ㅡ 위의 두 발언은 이율배반적이지 않다. 바다는 죽음의 장소인 동시에 재생의 장소일 수 있다. 사실 바다를 ‘죽음과 재생의 공간’으로 보는 것은 오랜 기간 문학에서 되풀이되어 온 인간의 보편적 상징체계와도 부합하는 것이며 그것을 우리는 ‘원형적 상징’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온 바 있다. 앞서 「해일」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재확인한 셈이다. 이렇게 말하자. “바다”는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곳이다. 다시 말해 그곳은 한 사람을 (상징적으로) 죽게 하고, (상징적으로) 재탄생시키는 상징적 의례의 장소다.

ㅡ 서정주는 「바다」를 스물셋 나이에 발표했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비(非)성인이 성인이 되는 길목에서, 모든 인간은 같은 고민에 빠질 것이다. 어떻게 이전과는 다른, 성인으로서의 새로운 ‘나’가 될 것인가. 이때 핵심은 ‘죽고 새로 태어나는’ 데 있을 것이다. 때문에 세계 여러 성인식 문화를 살펴보면 대부분 ‘죽음’이라는 테마를 공통적으로 함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표적으로 성인이 되려는 자를 물에 빠뜨렸다 꺼내는 관례가 있다. 이때의 ‘물’은 죄를 씻긴다는 의미뿐 아니라 소년/소녀였던 비(非)성인이 죽은 뒤, 한 명의 성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상징적 장소로 기능한다. 이른바 물에 빠짐으로써 죽음을 거친 자에게만 새 삶을 얻을 자격이 주어지는 셈이다.

ㅡ 그런 점에서 「바다」는 일종의 성인식이다.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한 청년이 깨끗한 성인으로 다시 태어나려는 의지가 이 시에는 있다. “침몰하라. 침몰하라. 침몰하라!”에서 침몰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되려 달성해야 할 목적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과거를 죽이지 않고 새 삶을 얻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려거든 우선 과거의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 죽음과 재생의 상징적 장소인 “바다”가 동원되었고, 그곳에 “침몰”하여 새로 태어날 자격을 얻으라는 것. 그러니 “침몰하라!”는 명령은 자살의 충동도, 삶에 대한 비관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생의 의지이자 삶에 대한 지향이다. 죽음을 거쳐야 새 삶을 얻어 재탄생할 수 있다는 ‘성인식’적(的)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 “침몰” 이후, 저 어린 “청년”은 성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이른바 “바다”에서 치러지는 성인식이다. 그 시적(혹은 상징적) 죽음 이후 그는 새 땅에서 새 인생을 살 것이고 그것은 “아라스카로 가라!/아라비아로 가라!/아메리카로 가라!/아프리카로 가라!”는 격양된 염원으로 나타난다. 저 땅에 바로 가는 법은 없다. 반드시 “바다”를 거쳐야 갈 수 있는 땅이다. 정확히 말하면, 바다에서 “침몰”해야만 겨우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바다로 상징된 공간에서 한 죄인이 죽은 뒤 예술가가 태어난다. 그 예술가의 탄생은, 첫째로는 “눈 떠라”를 통해 자신의 죄와 대면하였기 때문에 가능했고, 둘째로는 “침몰하라”를 통해 어릴 적 죄인으로서의 자아를 죽이며 완성되었다.

ㅡ 그러나 죄인이 성인으로 ‘새사람’이 된다는 의미는, 죄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삶으로 그것을 승화시키겠다는 뜻이지 과거의 죄가 없던 일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때문에 그가 새 땅에서 새 출발을 한다 해도, 그곳은 여전히 “밤과 피에 젖은 국토”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자화상」에서 “이마 우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멫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라는 구절도 이와 상통한다. 왜 “멫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겠는가. 그가 시인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 과거의 자신을 죽인 바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 탄생이므로 완전히 깨끗할 수는 없다. 다만 바다에서 침몰한 화자가 “피에 젖은 국토”에서 새 삶을 시작하듯이, “멫 방울의 피”가 섞인 “시의 이슬”로 그는 새롭게 살아갈 기회를 얻을 것이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시가 그에게 새 삶을 줄 것이다.

ㅡ 마지막으로 서정주의 「시론」을 읽으며 마무리한다. 이 시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시(詩)가 어떤 의미인지를 가늠케 하는 작품이다. 제일 좋은 건 님을 위해 남겨두라는 말의 의미를 알겠으되,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왜 하필이면 “바다”인가. 당신의 시는 왜 바다에서 탄생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앞서 말한 내용을 재확인한다. 그는 바다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 자, 바다에서 성인식을 치른 자다. 그런 그가 과거의 부끄러운 죄를 예술로 승화하고자 할 때, 그 예술이 바다의 속성을 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시의 산삼’이 아니고 “시의 전복”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시를 “바다에 두고” 있는 시인, “바다”에서 한 죄인을 “침몰”시키고 태어난 시인이기 때문이다.



10.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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