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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연습 Nov 03. 2022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한

#82)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2022)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기타노 다케시



두 달 전에 나온 진은영의 네 번째 시집은 단 한 사람에게 바쳐졌다.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304명에게 바쳐진 시집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바쳐지기를 304번 반복한 시집이다. 이 시집 앞에서 8년 전의 비극을 아직도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은 바보 같은 질문이다. 비극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시간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영원히 썩지 않는 불행을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는 시인들이 있다. '시인의 말'에서 그녀가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그녀는 그중 한 사람에게 다가간다. 그러고는 또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그다음 사람에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9면, 「청혼」 부분


ㅡ 제목이 "청혼"이니 이 시는 누군가의 사랑 고백이겠다. 그러나 단순한 고백은 아니다. '청혼', 이 단어가 '고백' 보다 무거운 낱말인 이유는 '나와 결혼해 줄래'의 의미는 '널 사랑해'가 아니라 '널 영원히 사랑할게'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의 연인이 되어줄 수 있지만, 오직 '영원히'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만이 부부가 된다. 그러니 청혼이란 얼마나 무거운 사랑의 고백인가. 그 위에 '영원'의 무게가 실려 있으니 말이다.

ㅡ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이 아름다운 문장에서 '영원'이라는 추상은 진은영을 거쳐 "오래된 거리"라는 구상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제 시인은 저 말대로 "너"를 영원히(오래된 거리처럼) 사랑할 것이다. "너"는 누구인가.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라고 시인은 썼다. 그녀가 약속한 영원한 사랑은 전 인류적인 사랑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바쳐진 사랑이다. 나는 이 글의 맨 앞에 인용한 기타노 다케시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비극으로 수많은 이들이 불행을 겪었는데, 이 중 어느 누구의 불행도 다른 사람의 것과 같지 않다. 누군가의 불행은 다른 누군가의 불행과 구별되어야 한다. 이것은 불행을 겪지 않은 우리가 그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겪은 불행 앞에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적인 태도다.

ㅡ 나는 문학의 할 일 중 하나가 바로 그러한 태도를 고수하는 것, 그러니까 누군가의 불행을 유일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배웠다. 말하자면 이것은 '불행의 단독성'(신형철)을 지키는 일이다. 기타노 다케시가 지적한 대로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불행을 범주화하는 일이고, 단순하게 만드는 일이며, 결국 그 불행을 겪은 사람들을 평범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문학은 결코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5천 명의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게 하여 '한 사람이 죽은 사건' 5천 가지를, 서로 전혀 다른 그 5천 개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 이야기들이 5천 명 전부를 구원한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적어도 5천 명을 한꺼번에 '규정'해 버리는 모욕을 저지르지 않을 수는 있다.

ㅡ 진은영의 저 시에서 나는 바로 그런 태도를 읽었다. 그녀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일괄하는 것이 아니고,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서 그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영원한 사랑'을 전한다. 8년째 잊지 않고 그런 말을 전할 수 있는 시인이 있기에 "예은이"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얻었을 것이다.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그날 이후」 중). 저 말이 감동적인 이유는 단순한 위로의 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에 의해 "예은이"는 정말로 영원히 사랑받게 될 것임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이 더 많이 읽히고 더 오래 읽혔으면 좋겠다. 그러면 "예은이"는 정말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가 될 것이고, 우리는 누군가를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기다란 목과
두 팔과
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등 위로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15면,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부분


ㅡ 이 구절이 이 시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영원한 사랑이란 과연 저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는 걸까, 민달팽이처럼 천천히, 끈적하게, 믿을 수 없게……. 최근 안타까운 사고가 또 발생했다. 이 글을 쓰는 시각을 기준으로 이번에는 156명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 죽은 사고가 156건 일어났다. 이제 문학은 무엇을 해야 하나.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156번 반복해야 한다.



11.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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