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올가 토카르추크, 『낮의 집, 밤의 집』, 민음사(2020)
ㅡ 매체에 대한 자의식을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반드시 그 매체를 통해서만 존재 가능한 작품들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해리 포터> 시리즈로부터 우리가 매체에 대한 자의식을 발견할 수 있을까.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1997년 영국에서 J. K. 롤링에 의해 제1권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출간된 이후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며 연재된 총 일곱 권짜리 '소설'이다. 이 시리즈는 2001년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 시작하면서 그 전설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그런데 나는 이 시리즈의 열렬한 팬 중 한 명이면서도, 다음과 같은 질문 앞에서는 회의적이게 된다. <해리 포터>는 대단한 이야기지만, 대단한 '소설'이기도 할까?
ㅡ 다시 말해 소설로서의 <해리 포터>와 영화로서의 <해리 포터>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 소설은 너무나 멋지게 영화로 다시 태어났고(나는 소설 전권과 영화 전편을 모두 봤다), 소설에 매료되었던 만큼 영화 버전 역시 좋아한다. 둘 중 무엇이 더 나은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작품이 '반드시 소설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지를 물으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학으로서 <해리포터>는 자신이 '소설'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작품인가. 그것이 얼마든지 소설도 될 수 있고 영화도 될 수 있다면(즉 반드시 소설일 필요가 없다면), '문학적인 것'을 가졌다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 시리즈는 문학적인 필연성을 갖고 언어로 표현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우연히' (영상이 아니라) 텍스트의 옷을 입고 먼저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ㅡ 그런 점에서 그저 문학과 영화와 음악이 아니라, 진실로 '문학적'인 문학, '영화적'인 영화, '음악적'인 음악과 만나기를 고대하며, 나는 여기에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들을 소개하려 한다. 자신이 다른 무엇도 아닌 '소설'이라는 인식을 단 한순간도 저버리지 않는 그의 소설들은, 자신이 언어의 예술이라는 그 지독한 자의식을 결코 망각하는 법이 없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그녀가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목된 후, 이 낯선 이름의 소설가가 어떤 소설을 썼는지 뒤늦게 찾아 읽기 시작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소설 앞에서 나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가령 이 소설 『낮의 집, 밤의 집』에 깊은 감명을 받은 한 영화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문장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어야 할 것이다.
꿈이 과거의 사건들을 반복할 때, 과거를 모호하게 만들어 이미지로 바꾸고, 의미의 체로 걸러 낼 때, 나는 미래와 마찬가지로 과거도 영원히 불가사의하고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내가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이 내가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미래와 마찬가지로 과거도 똑같이 두렵다.
138면
ㅡ 과연 이를 영화화하는 것이 가능한가?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 영화는 이 소설과는 이미 다른 영화가 되고 말 것이다. 최소한 위의 저 문장을 영상으로 찍어내기는 불가능하니까. 단순히 문장을 영상으로 옮기는 일의 어려움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마음의 장소가 있다는 말이다. 화자가 "나는 미래와 마찬가지로 과거도 똑같이 두렵다"고 고백할 때, 우리는 언어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는 결코 화자의 저 내면 속 진실을 쓰다듬을 수 없었으리라는 절실한 발견 때문에 아득해지고 만다. 언어가 가장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다. 언어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ㅡ 오직 언어로만 할 수 있는 일. 그게 무엇이냐, 참신한 결론은 안 되겠으나 내가 아는 한 가지 확실한 길은, 마음을 적는 일이다. 영화는 마음을 찍을 수 없고, 음악은 마음을 들려줄 수 없다(가능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한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문학은 마음을 쓸 수 있다. 그래서 단 한 문장에서라도 인간의 마음에 대해 쓰지 않았거나 최소한 쓰기 위한 노력조차 발견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문학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는 문학, 그러니까 문학적 자의식이 없는 문학이다. 언어 없이는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마음, 소설은 바로 그런 것을 보여 주는 유일한 창구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의 좋은 예가 다음과 같다.
마렉 마렉은 자기 안에 새를 품고 있었다. (중략) 새는 쉴 새 없이 날갯짓을 했고, 다리는 묶여 있었으며, 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마렉 마렉은 그것이 자기 안에 갇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그 안에 가두었다. (중략) 작은 새가 그 안에서 비명을 질렀다. "날 좀 내보내 줘. 풀어 줘. 난 네 것이 아니야. 난 다른 곳에서 왔어."
33~34면
ㅡ 이것이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폴란드의 한 소설가가 보여 준 '마음 쓰기'의 한 사례다. 삶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끝내 죽음을 택한 남자가 있고, 이 소설은 그 남자의 내면을 받아 적는다. (근래의 어떤 소설들이 종종 그렇듯이) 작가가 사건을 일으키고 인물들이 거기에 휘말리게 만든 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마침내 '해결'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절대로 해결 불가능한 마음의 엉킴과 그것의 성실한 기록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소설일 수밖에 없었던 소설이다.
ㅡ 내게 소설 읽는 일은 취미도 오락도 아니다. 나는 이것이 사람에 대한 공부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삶은 단 한 번 주어지고 그 삶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일 수 없다는 슬픈 한계 앞에, 소설을 읽는 동안은 잠시 타인의 삶을 살 수 있다는 다행스러운 사실이 놓여 있다. 그러니 소설 읽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쉬운 일일 수 없고 또 쉬운 일이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일은 타인을 읽는 일이고, 곧 타인을 이해하는 연습이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소설들은 스타일은 제각각일지 몰라도 한 사람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는 점에서는 언제나 같다. 우리 시대의 소설들이 이 점을 알기를. 바로 그러한 자의식을 갖춘 소설이 되기를. 그렇게 바라면서 나는 올가 토카르추크를 읽고 또 읽는다.
12.2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