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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필 Dec 23. 2023

옛 일기를 보여줄 수 없는 이유

우연히 오랜 일기를 발견한 날

우연히 오래전 블로그에 적어 두었던 글들을 보게 되었다. 기타 줄을 가는 방법도 있었고 아버지와 함께 동해 횟집에 갔었던 일도 글로 적혀 있었다. 강아지를 기를 때라 처음 강아지를 데려와서 있었던 일을 적어 두기도 했었다. 그리고 미처 공개할 수 없었던 비공개 글들도 있었다. 아내는 그 ‘비공개’ 되어 있는 글들에 관심을 보였다.

  ‘비공개’로 해두었던 글은 읽어보지 않아도 어렴풋이 기억났다. 당시 연애했을 때의 감정들을 토해내듯이 써놓은 글들이다. 내가 보기에도 부끄러운 것들. 나는 그것을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왜 아내에게 보여줄 수 없었을까. 우선 부끄러운 마음이 크다. 어린 시절에 나는 정말 생을 바칠 것처럼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다. 영영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이 땔감이 있다고 믿는 것처럼 맹렬하게 타오르는 감정에 자꾸만 마음을 더했다. 얼마나 더 뜨거워지는 줄도 몰랐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꽤 열렬했었기도 했고 앞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모든 것을 퍼붓듯이 사랑했었던 기억이 있다.

  보여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이전에 다른 연인에게서 있었던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추억과 관련된 물건들 때문에 다툼이 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 왜 버리지 못하느냐며 그녀는 화를 냈고 지난 사람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모두 가져다 버리라고 했었다. 앞서 말했듯 사랑을 '퍼붓듯이' 하는 편이기 때문에 당시에 정신이 없이 그 모든 것들을 버렸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아직 그것들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고 너무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끊어버렸던 것이 상처로 남았다.

  세 번째 이유는 지난 나의 감정들을 돌이켜 보면 나에게 또 어떠한 감정들의 동요가 생길까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때로 여전히 그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 후회가 되는 것들, 기뻤던 일들, 상처가 되었던 순간들까지도 아주 오랜 시간 잊히지 않는다. 삶에 어떠한 순간들마다 그런 옛 기억이 떠오르면, 마치 선명하게 그린 그림 위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현실이 희미하게 번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아득해지며 어지러운 느낌. 감정의 현기증.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 기억들로부터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아내에게 옛이야기를 보여줄 수 없는 것은 여전히 과거가 너무 아린 느낌으로 남는다는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한동안 내 삶을 기록할 수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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