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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비 Dec 11. 2022

재미로 사는 인생

재미없어서 재미있는 인생

재미있다. 인생이 재미있다. 아니다. 하나도 재미가 없다. 자꾸 심심한 것이 별로 재미가 없다. 그래서 내가 살아있는 거구나 느끼는 것이 인생의 모순이다. 재미있는 걸 찾아서 둘러보게 된다는 것이, 그래서 내가 살아있구나 또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인생의 모습이다.

매일같이 올려다보는 하늘과, 그 밑의 실금같이 앙상해 있는 나뭇가지를 봐도 슬프지 않다. 조용한 대예배당에 들어가 2층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이어폰을 꽂아도 무섭지가 않다. 햇빛 내리쬐는 곳에 서 계신 성모님을 보면서 반짝이는 햇살에 똑같이 반짝이는 먼지를 보며 보잘것없는 게 없음을 느낀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던 부질없어 보이던 모든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살아있어서 이 모든 것을 다시 쓸 수 있다.


욕심이 생긴다. 온갖 음울했던 감정은 층위마다 다 느껴봤으니. 그냥 행복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나의 호시절, 오늘을 좀 더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 다시 떠나가면 런던은 무섭지 않을까, 또다시 스위스에 간다면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내려와 볼 수 있을까. 그 순간에 하지 못했던 일들이 자꾸 맴돈다. 예전처럼 떠올릴 때마다 이가 달달 부딪히던 시린 기억 말고.


파편 같은 추억이 이제 내겐 없다. 지난날 하도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어서 그런가, 날이 선 것들이 닳아간다. 곱씹을 때마다 나를 찔러오던 숱한 기억들이 무력하다. 내가 기운을 차리니 나를 괴롭히던 것들이 무기력해지나 보다. 교수님의 말씀대로 나는 지나간 것들을 두고 떠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렇게 상담을 한 달에 한 번씩 하기로 했다. 나는 다소 무뎌진 듯한데, 교수님은 평정심이라 이야길 하신다. 평정을 찾은 것일 뿐,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더욱 선명해질 거라고 하셨다. 그래서 떠나고 싶다. 하던 것을 멈추고, 오랫동안 고민하던 것을 마무리 지어야지. 실행하면 고민은 없어진다.


제일 먼저 떠나기로 한 곳은, 원래 하던 일이다. 매일 함께 하는 보석들 말고, 내가 만든 내 보석이 가지고 싶었다. 작고 소중한 모든 것들을 사랑하자는 내 마음! 한눈에 반해 조약돌 같은 카메오 나석을 샀다. 쉘 카메오, 손으로 직접 깎은 것이라는 이태리산이랜다. 그 속의 소녀는 꽃 향기를 맡고 있다. 내게 줄 나의 첫 번째 디자인으로 딱이다. 파란 잎보다 꽃이 먼저 펴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린다는 매화처럼 카메오 속 꽃이 새하얗다. 크리스마스가 되기 전에 나의 첫 번째 주얼리가 나올 것이다.


교수님은 융의 연금술을 떠올리셨단다. 나를 보며 미소 지어 주셨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교수님의 마스크 속 미소를 보니 내가 잘 자라고 있나 보다. 무질서하고 시커먼 카오스 속에서 어떤 질서를 잡고 결국 금을 연성해내는 과정처럼, 내가 디자인을 하기 위해 겪은 과정들이 그랬을 것이라고 하셨다. 개성화 과정이란다. 나는 꿈을 꿀 때도 화려한 색상과 내가 쓴 곡이 들리는 것을 재생시킨다. 그런 맥락이라면 개성화 과정 중 무의식에 대한 체험을 실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꿈에서 쓰던 그 색깔과 그 음절을 실체화하고 싶은 욕심에 요즘은 마음이 바쁘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삶을 사랑한다"라고 말한다면 대부분은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안다. 그 말을 들으면 우리는 성장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되는 아이, 형태를 갖추어가는 아이디어, 한창 성장 중인 조직에 매력을 느끼는 누군가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돌이나 물처럼 생명이 없는 것조차 살아 있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 그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그것이 크고 힘이 세서가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30살에 죽으려고 했는데, 만으로 30년을 꽉 채우고도 조금 더 살고 있다. 이렇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은 온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생과 사를 고민하다 고민을 멈췄다. 고민해봤자 답은 하나였던 고민. 내겐 이번 삶이 전부다. 눈에 닥친 오늘이 전부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죽고 싶을 겨를이 어딨는가. 죽고 싶었던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부끄러워 죽겠다. 나는 책도 써보고, 에리히 프롬의 모든 책을 읽을 것이고, "This is my bookstore"에 실린 책방도 모두 가보고 싶고, 작곡도 10곡은 해봐야겠고, 내가 가진 인형들도 모두 나눠주고 싶고, 다 털어내는 순간엔 런던에 가야지. 소민 씨에게 전화를 걸어 자주 가는 앤틱한 그 가게를 물어봐야지. 그리곤 박민아 교수님의 석사가 될테야.


아무튼 죽겠다. 재미있어서 죽겠고, 시시한 지금의 순간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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