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3일엔 프로포즈를 받았다. 고작 '23일엔'이라고 표현해도 괜찮을지 모를 만큼 그날엔 큰 의미가 더해졌다. 그날은 선물 받은 금목서 향기에 취해 집을 나선 날이었다. 머리카락 끝에나 조금씩 묻히는 정도라 나만 아는 향기였다.
오후에 친구네 부부와 약속이 있어서 오랜만에 차를 두고 나온 남자친구와 남포동을 거닐었다. 내가 좋아하는 빵집을 가고, 그날따라 아무도 없었던 카페에서 수다도 떨었다. 그러다 시간 계산을 잘못한 덕에 다음 약속 장소로 일찍 출발했다. 내친김에 바다에서 해가 넘어가는 걸 보자며 남자친구는 즐거워했다. 약속 장소가 태종대의 자갈마당이었기 때문이었다.
태종대의 바닷바람을 알고 있던 나는, 소싯적에 그 바람을 맞고 아물던 상처가 찢어졌던 때를 떠올렸다. 차갑고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싫었다. 버스를 타고 영도 안쪽까지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은 40분가량. 남자친구는 버스 멀미를 하며 내내 졸았다.
버스 창문으로는 오후에만 느낄 수 있는 부서지는 햇살이 가루처럼 들어왔다. 사실상 그게 먼지라고는 해도 달빛 같은 것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했었다. 햇빛이 있어야 밤하늘의 달이 보이는 것처럼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 실은 촘촘히 엮여있는 세상은 신기한 곳이라고.
이 글을 읽을 사람은 정해져있고, 나를 이미 아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또 적어두는 것이지만, 나는 생각할 여유만 있다면 세상의 진리, 삶의 모습 같은 것들이 궁금해 머릿속을 가동하고 있다. 그중에 어떤 건 내 삶에 남고 어떤 건 또 이렇게 글로 남는다. 프로포즈를 받았던 날, 우연처럼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라는 의미다. 평소 같은 편안한 날이었다.
그렇게 태종대에 도착하고 나서는 버스정류장에서 자갈마당까지 걸어가는 고작 그 몇 분간, 칼바람을 맞고 정신이 없었다. 옷을 생각보다 얇게 입은 것이었다. 예상대로 태종대는 바람이 많이 불었는데, 자갈마당은 그렇지 않았다. 동그랗게 파도에 깎이고, 쓸려왔다 나갔다 바다가 밀고 당긴 자갈이 햇빛을 받아 반질거렸다. 태종대 입구에선 그렇게도 불던 찬 바람이, 바다를 바로 마주 보고 있는 자갈 해변에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에는 세상의 햇빛을 다 모아놓은 것 같은 윤슬이 펼쳐졌는데, 아마 내가 바다는 추운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 윤슬이 더 따뜻해 보였다. 남자친구는 보통의 남자들처럼 자갈을 주워 물수제비를 뜨며 놀았다. 그런 남자친구를 보면서 나는 또, '이 돌멩이가 실은 바닷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거면 어떡하려고 이렇게 던져?' 이런 말이나 하고 있었다. 파도가 들려주는 자갈들의 웅성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 오가는 파도 사이로 유독 큰 돌 하나가 보였는데, 아직 뾰족한 것으로 보아 파도 틈으로 간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돌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남자친구는 파도를 향해 덤비듯 달려들어 간신히 그 돌을 주워왔다. 왜일까? 그걸 왜 주워다 주었을까? 흘러 지나가는 말에도 이렇게 반응해 주는 남자친구를 보며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는, 같은 색깔의 돌 두 개를 주워오더니 이건 나, 이건 자신이라며 넓적한 돌 위에 올려두었다. 어떻게 이 많은 돌 중에서 같은 색을 찾았는지 신기해서 사진을 찍어뒀다. 원래는 같은 돌이었다가 파도에 부서졌는지, 기원은 모르겠지만 돌 두 개를 가지고 나름의 이야기를 쓰는 남자친구를 보며 행복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영화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어디서 실밥이 터지는 소리가 났는데, 남자친구에게 엊그제 선물했던 코트의 끝단이 아직 뜯어지지 않았단 걸 발견했다. 그래서 남자친구는 손으로 힘을 주면 뜯어질 것 같다며 내게 그걸 뜯어달랬다. 옷이 상하는 것 같아서 그것도 싫었는데, 힘을 콱 주니까 속 시원하게 뜯겼다.
그러더니 갑자기 돌아서더니 내게 반지함을 내밀었는데, 처음엔 또 예쁜 돌을 주웠다고 보여주는 줄 알았다가 가만 보니 반지였다. 언젠가 프로포즈를 받는 순간이 온다면 내가 어떤 모습일지 너무 궁금했는데. 그날이 오자 나는 울고 있었다.
반지를 보자마자 운 것이 아니라, 반지를 알아보고는 울었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이 반지가 가진 의미를 알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것은 타자를 치는 이 손과, 아직 낫지 않은 발과, 나만 아는 금목서향 같은 것 뿐이었다. 남자친구는 그런 내게 '정윤이가 정윤이답게 살 수 있으면 좋겠어. 안아팠으면 좋겠고. 그걸 내가 도울 수 있으면 좋겠어, 곁에만 있어줘.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줄래?' 라고 물었다.
나는 도저히 나라는 사람과 결혼할 이유를 찾을 길이 없어서 갑자기 파도에 던져진 자갈처럼 눈물에 얼굴을 담그곤 물었다. 왜 나랑 결혼해야겠다 싶었는지, 정말 그래도 괜찮은지. 그러자 결혼하지 않을 이유를 못찾았다고 했다. 그 노래는 발매되자마자 내가 남자친구의 플레이리스트에 별 뜻없이 심어둔 노래였는데, 답장으로 받게 되었다.
남자친구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계속 닦아주며 어떤 말을 계속 이어나갔는데,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바다가 추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춥지 않았어. 여기까지 와봤으니까 알게 된거지. 내가 살아보지 않았으면서도, 짐작으로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싶었던 수많은 날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나. 그런데도 데려와줘서 고맙고, 살아보고 싶게 해줘서 고마워. 결혼하자, 나를 만나줘서 고마워.'
돌처럼 살던 나에게 가끔은 파도가 되고 가끔은 바다가 되겠다던 남자친구(82주 전에 글을 썼었다), 나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후에 듣고 보니, 반지가 제작된 후에는 내내 반지를 들고 다녔다고 했다. 언제 프로포즈를 할지 본인도 몰랐고, 거창한 계획도 생각해 보았었는데 이렇게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너무 긴장하여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바다냄새가 싫어서 대학도 다른 곳으로 갔었지만 이곳으로 돌아왔고, 바다는 추워서 싫었는데 탁 트인 바다는 쳐다만 봐도 시원하다며 좋아하는 남자를 만났었다. 그땐 벚꽃을 보러가자고 했었다. 그건 어떤 봄의 이야기.
금목서는 가을과 겨울 사이에 꽃을 짧게 피우고, 향기가 빠르게 날아간다. 그것이 이 우주 속에 잠깐 살다갈 내 삶이라면 그와 함께 하는 것이 이 향기를 오래 기억하게 해줄 것 같았다. 이건 어떤 꽃이 핀 가을의 이야기. 11월 23일, 금목서 향기가 가시지도 않고 내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