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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기일 Mar 18. 2020

애기능 - 2020

2020년의, 애기능.

“있잖아요, 혹시 이 책 읽어봤어요?”


그녀가 나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다. 벚꽃이 흐드러진 계절에, 애기능 동산에 책 한 권과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녀를 응시하고 있자, 나에게 다가오며 한 말이었다. 나는 군대를 막 마치고 학교에 적응하고 있던 복학생이었기에, 여성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운 상태였다. 그래도 감사하게도, 나에게 말을 걸어왔기에 바보같이 얼버무리며 대답을 했다. 동시에 그녀가 나에게 내민 책의 표지를 슬쩍 훔쳐보았다.


[데미안]이라고 써져 있었다. 군대에서 시간이 하도 가지 않아 펼쳐본 책이었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난해하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고개를 저으며 덮었던 기억이 있는 책이었다. 그 책은 아무도 꺼내 보지 않았고, 퀴퀴한 먼지만이 쌓여가는 모습이 내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니요, 그래도 예전에 읽어 본 기억은 있네요.”


나에게 책을 건넨 상대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데미안이라는 책에 대해서 나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방금 내민 그 책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라는 것으로 시작해서, 작가인 헤르만 헤세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까지, 책에 대한 정보를 쉴 새 없이 나에게 뱉어냈다. 언제 끝날 지 몰랐던 이 장황한 웅변은 끝이 났고, 나는 진이 다 빠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 상태였다. 이런 나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자신의 말을 들어준 보답으로 커피를 한 잔 대접하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이 종종걸음으로 향하는 곳을 따라가다 보니, 자주 가던 커피숍이 나타났다. 커피숍에는 생각만큼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안암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자신의 공간에 있어서 이 장소를 많이들 찾지 않는 것 같았다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다고 했기에,  오렌지 에이드 하나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두 잔의 음료가 준비되었다는 신호가 오기 전까지,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운 고민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흠, 왜 저를 그렇게 쳐다보고 계셨나요?”


존대의 표현으로 훅 들어오는 바람에 나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문장을 입 밖으로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혹시나 스토커 같아 보이지는 않을까,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잠시 내 앞의 시선을 살폈는데,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눈길이 느껴졌다. 굳이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왠지 편하지 않은 느낌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다행히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는 진동 소리가 나를 불러주었고, 나는 그 불편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자, 정신이 확실히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커피 없이는 살지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 앞의 사람에게 솔직한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었다. 최대한 간결하게 말이다.


“어… 벚꽃과 정말 잘 어울리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의외의 대답에 놀랐다는 듯, 뺨이 붉게 물드는 모습이 보였다. 애기능의 분홍빛을 닮은, 수줍어 보이는 뺨에 설렘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반응 이외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연한 분홍빛과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 후, 우리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시간을 편하게 물들여갔다. 이 사람은 유난히 활기차고, 밝아 보였다.


“왜 애기능에 앉아 계셨던 거예요?


이번 학기에 듣는 수업을 들으려면 애기능을 가로지르는 동선을 타야 했다. 그런데 그 길을 지날 때,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항상 책을 들고 있었는데, [데미안]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읽고 있었다. 수업을 가는 길에 같은 나무 아래, 같은 시선에서 이 사람이 데미안을 읽고 있는 모습을 항상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을 한다면 의도치 않게 나쁜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항상 그 자리에 앉아 계셨던’이라는 문장에서 ‘항상’이라는 단어를 생략하기로 했다.


“그냥요. 따뜻한 날에 그 장소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런 장소 혹시 없으신가요?”


누구나 그런 장소는 가지고 있지 않느냐는 느낌의 말과 함께 오렌지 에이드를 홀짝이며 대답하는 모습이 의외로 편안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이 사람을 지켜본 내 생각은 달랐다.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이 사람의 표정에는 그림자가 항상 드리워져 있었다. 근심거리를 한가득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조금 편안해진 표정을 본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이었는데, 그래도 어떤 사연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표정으로 애기능에 앉아 있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차마 묻기에는 무거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굳이 묻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무거운 주제에서 가벼운 주제로 넘어갔기 때문에 우리는 꽤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살고 있는 곳은 어디인지부터, 내가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아 하는 군대 이야기까지 꺼냈다. 회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지만, 너무 궁금하다며 집요하게 물어왔기 때문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난 2년 정도의 일들을 말해주자, 군대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는 말과 함께 분홍빛으로 웃어 보였다. 정신없이 이야기를 하다 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가게를 나섰을 때 전화번호를 물어보자고 계속 다짐했지만, 결국 먼저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먼저 전화번호를 물어봐 주었던 덕분에 겨우 이 사람의 번호를 알아낼 수 있었다. 집에 가는 길, 버스에서 카카오톡을 확인하니 그녀의 프로필이 떠 있었다. 몇 문장을 끄적였는데, 다시 읽어보니 너무 성의 없는 것 같아 몇 번을 다시 지우고 쓰기를 반복했다. 결국 보낸 문장은 오늘 즐거웠다는, 단순한 한 마디였다. 답장은 생각보다 빨랐다. 메시지에는 이모티콘 하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볼을 쭉 잡아 늘리면 어디까지 늘어날까 궁금할 정도로 말랑말랑해 보이는 이모티콘이었다. 묘하게 이 사람과 닮아 있어서, 귀엽다는 생각과 함께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혹시, 지금 뭐 하세요? 애기능은 어떠세요?]


그 후, 우리가 만난 것은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조용하던 휴대전화가 웬일로 울리나 싶었는데, 메시지를 보니 잠시 만나자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신기하긴 했다. 보통 시간 괜찮은가 물어보는 것이 먼저 아닌가. 애기능은 어떻냐고 묻는 메시지가 왠지 판매원이나 할 법한 멘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수업이 끝난 후에 딱히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애기능으로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겼다. 팔랑팔랑 떨어지는 벚꽃 잎 사이에서, 데미안의 책장도 팔랑, 넘어가고 있었다. 페이지 수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니, 일주일 동안 정말 열심히 읽었던 모양이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책 한 권을 저렇게 읽어보고 싶었다. 다가가서 장난을 조금 치고 싶었는데, 눈치가 얼마나 빠른 건지, 아니면 내가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나를 보고 바로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에 장난은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도 웃는 모습이 참, 밝아 보여서 내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정말 많이 읽으셨네요, 저는 책을 혼자서 읽은 지 꽤 오래됐는데.”


노력만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혹시 읽어보지 않겠냐며 데미안을 내게 건네는 손이 보였다. 나중에 내가 따로 읽어보겠다고 말했더니, 지금 조금이라도 읽어봤으면 좋겠다며 투덜거렸다.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 내가 왜 불렀냐는 질문을 하자, 그녀는 조그마한 탄식을 내뱉고는 잊어버릴 뻔했다며 고맙다고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혹시 함께 가고 싶은 장소가 있는데, 시간이 괜찮냐고 물어왔다. 저녁에 친구들과 치맥을 하기로 한 것이 생각났지만, 오늘은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로 결심했다. 오늘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운 좋게도 시간을 함께 보내자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다는 말을 하자, 나는 바로 그녀의 손에 이끌려 버스에 올랐다. 다섯 시 정도였기 때문에 사람이 꽤 많았다. 나란히 서서 가는 도중, 동네 친구들에게 오늘 급한 일이 생겨서 가기 힘들 것 같다는 거짓의 메시지를 보냈다. 내 옆에 서 있는 그녀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신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면,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내용이 보일까 봐 메시지만 보내고 얼른 휴대전화 화면을 껐다.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하는 것을 보니 친구들이 내 욕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에 가차 없이 알람을 꺼 버렸다. 알람을 끄는 모습을 보았는지, 옆에서 계속 시선이 느껴졌다. 혹시 내용을 보았나, 하고 조금 겁이 났지만, 그다음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더욱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혹시 여자 친구 있어요?”


능청스럽게 받아치고 싶었지만, 장난을 치기에는 목소리가 너무 진지했기 때문에 나는 솔직하게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만족스러운 건지, 아니면 의문스러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눈을 창가로 향하는 그녀를 보니 괜히 또 신경이 쓰였다. 혹시 이 사람이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는 것인가 싶기도 했고, 여자 친구가 있는데도 낯선 여성과 함께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는 질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발 뭐라도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녀는 도착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몇십 분을 보내며 얼른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극에 달할 때쯤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최대한 빨리 문을 나서니, 한강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 산다면 한강은 많이들 가는 것 같았지만, 나는 가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사실, 별로 좋은 기억은 없었기에 의식적으로 가지 않았다. 우리가 정확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나는 날 잡아 이끄는 따뜻한 손을 지도삼아 걷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분 걷다 보니 커다란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별로 반갑진 않았다. 하필 이 장소라니. 올라가 보니 다리에는 세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벤치가 있었는데, 그녀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몸놀림은 꽤 가벼워 보였지만, 벤치에 앉을 때는 힘든 듯 털썩 주저앉는 모습이 보였다. 나 또한 조금 지쳐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가운데를 비워 놓고 그녀의 반대쪽에 앉았다. 고사리손에 이끌린 장소는 생각보다 감성적인 장면을 내게 선물해 주었다. 마침 해가 지고 있었기에, 노을이 다리 위의 풍경에 운치를 더했다. 내 기억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었기 때문에 더 마음에 와 닿았다.


“너무 예쁘지 않나요? 얼마 전부터 이 장소에 매료됐어요. 이 노을은 여기서만 볼 수 있는 최고의 풍경이라고 생각해요.”


조금 이상했다. 분명히 표정은 웃고 있었는데, 목소리는 조금 무거웠다. 하지만 그 웃음이 억지로 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로 이 노을에 매료되어 있는 것이다. 좌우를 천천히 한 번씩 둘러보고는 이 경치에 대한 감상을 주저리 늘어놓았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그녀도 기분이 한 층 좋아진 것 같았다. 기분이라며 생색 좀 내겠다고 말하며, 가방에서 오렌지 주스 두 개를 꺼냈다. 원래 혼자 마시려고 샀는데, 안목이 있는 나에게 특별히 선사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주스의 라벨에는 [좋은 하루!]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요즘 오렌지 주스에는 저런 문장도 함께 내는구나 싶어 유심히 살피던 나는, 갑자기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질문을 받았다.


“과거가 미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까요?”


갑자기 나에게 던지는 철학적인 질문 덕분에 나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노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슬픔이 어려 있었다. 분명 아까 무거운 목소리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계속 고민을 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고민하는 모습만을 보여주자, 그녀는 장난이라며 너무 진지하게 반응하지 말라고 했다.


“음, 과거보다는 현재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데미안을 읽은 현재와 읽지 않은 과거가 있다면, 미래는 분명 현재에 더 영향을 받을 거예요. 그리고 저는 이 말이 옳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멋진 말은 아니었다. 더 멋진 말을 해서 폼을 잡고 싶기도 했지만, 이게 내 한계였다. 그래도 전하고 싶은 바는 어느 정도 전달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과거가 어찌 됐든,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재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을 그대로 전하기엔 조금 낯부끄러웠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무안해진 나머지 오렌지 주스를 쭉쭉 마시기 시작했다. 차마 그녀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런데 옆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약간의 눈물을 닦아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했나, 싶었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녀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좋은 말이에요. 그렇다고 과거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도 아니겠죠. 과거도 예전엔 현재였을 테니까요.”


내 말의 의도가 정확히 전달되었다는 것에 놀랐고, 그 뒤에 따라붙은 문장에 다시 한번 놀랐다. 잠시 이 사람을 가만히 응시했다. 눈물을 다 털어낸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아까 애잔한 웃음과 함께,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갑자기 울어서 당황했을 것 같았다는 말을 건넸는데,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도 적당히 웃으며 사과를 받았다.


“데미안 있잖아요? 얼마 전에 읽게 된 책이었거든요. 완전히 매료되어버렸어요. 와 닿는 부분들이 많더라고요. 정말 몇 번 읽어봤는지 이젠 저도 헷갈릴 정도예요.”


이 사람이 애기능에서 책을 천천히 읽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몇 번이고 읽어 내려갔다면 진도가 나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이 대화 후, 그녀는 집에 가야 할 시간 아니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숨기고 싶은 것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지만, 내가 다가가면 더욱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원래 아물던 상처도, 계속 건드리다 보면 흉으로 번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서로 잘 가라는 인사를 한 뒤, 광화문에 잠시 가기로 했다. 집 근처에 서점이 없었기 때문에, 책을 사려면 광화문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집과는 반대 방향이라는 것이었다. 정말로 비효율적인 동선을 굳이 걷게 된 이유는, 데미안을 읽어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도착하고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니, 애기능 하면 생각나는 그 책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정답은 자신 안에 있다!’라는 문구와 함께 책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책을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책 값이 꽤 비쌌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이 책을 읽고 있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고, 나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책을 읽어 내려갔다. 예전에 조금이지만 읽어봤던 책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충이나마 줄거리가 머리에 있었으니, 오히려 집중하기 더 힘들다는 느낌도 있었던 것 같다. 마음을 잡고 읽기 시작하니 헤르만 헤세의 단어들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쉬운 상대는 아니었지만, 그 날 나는 일련의 이야기를 모조리 읽어버렸다. 싱클레어의 무거운 고뇌, 데미안의 신비로움과 함께 나는 밤을 지새웠다. 어렴풋이 와 닿는 게 있었다. 주인공이 방황을 일삼다 신비로운 존재를 만나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는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는 것은, 내가 그녀에 대해서 예상한 것이 어느 정도는 들어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사람도 계속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순간 데미안 같은 신비로운 존재가 되고 싶었다. 이 사람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아니, 나 자신이 삶의 지침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을 감으니 애기능의 풍경이 보였다. 벚꽃 잎은 흩날리고 있었고, 그 사람은 그곳에서 외로이 앉아 있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지난번과 똑같이 고사리손에 이끌려 나도 모르는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밥을 먹고 나른함에 하품을 하며 폭풍의 언덕 쪽으로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마주친 그녀가 날 부르더니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며 대뜸 안암역으로 끌고 갔다. 가는 길은 왜 이렇게 복잡한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탄 후 버스를 타고, 심지어 하차하고 나서도 조금 걸어가야 했다. 고생 끝에 도착한 곳은 보육원이었다. 보육원은 와 본 기억이 없었다. 덕분에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한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설은 그렇게 좋지 않았는데, 아이들은 꽤 많아 보였다. 이런 시설에서 아이들을 기른다는 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더 좋은 곳에서 자란다면 좋지 않을까. 시설 담당자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반겼다. 이내 아이들과 잘 섞여 돌봐 주는 모습을 보다 보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붙임성이 별로 없어서 예전부터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냥 구경만 하고 있자고 마음먹었었는데, 그녀가 이 아이들과 시간을 좀 보내 보는 건 어떻겠냐며 나를 잡아끌었다. 나를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조금 불편했기 때문에 멋쩍게 인사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반갑게 날 맞아주었다. 몇 살이냐는 질문부터 여자 친구는 있냐는 질문까지, 궁금한 게 이렇게 많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질문 공세를 받았다. 여자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하기 전에 그녀의 반응을 살폈는데, 오묘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그냥 없다고 얼버무렸다. 아이들은 재미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다시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기진맥진해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아이들과 어울리는 데는 소질이 없다. 반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정말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본성이 따뜻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정말 정신 연령이 비슷해서 그런 것일까. 물론 후자는 아닐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실제로 어른스럽기도 했고 말이다. 잘 어울린다는 말을 듣더니, ‘제가 그렇게 어려 보여요?’라며 능청스럽게 날 놀리기 시작했다. 몇 번의 장난스러운 대화가 오간 후, 나는 어떻게 아이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전에 몇 번 와 본 적 있고, 이렇게 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말을 하며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했다. 학교를 다니며 보육원 봉사를 다니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이런 활동을 왜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어떤 느낌일까 싶어서요. 이 아이들은 왜 버려졌을까, 버려진 후에는 정말 외롭고 무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이들에게는 죄가 없죠.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을 뿐이죠. 그런 최악의 상황이었다면,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수도 있을 거예요.”


역시 이번에도 눈에 슬픔이 어려 있었다. 단순한 아이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난번 다리에서도 이 눈을 본 적이 있었고, 아마도 뜬금없이 던졌던 그 질문과 연결된 부분이 있을 것이었다. 그 말을 하고 조용히 바닥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괜한 질문으로 상처를 다시 건드린 것은 아닌가 싶었다. 시선을 아래로 하니 하얗고 가녀린 손이 보였다. 평소와는 다른 점이라면,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와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두려움에 내가 개입할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별 것 아닌 행동뿐이었다.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내 손을 뻗어 보았지만, 두 손이 닿으려 할 때쯤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 배고파요.”


보육원 근처에서 식사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는 다시 안암으로 가기로 했다. 먼 길을 돌아간다는 것이 귀찮았지만, 조금이라도 그녀의 기분이 풀리길 바라며 안암으로 가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고난의 길을 거쳐 안암역에 도착하고, 그녀는 맛있는 것이 먹고 싶다고 했다. 이런 소소한 소원까지도 이루어 주고 싶었지만, 지갑을 열어 보니 데미안의 영수증과 오천 원이 들어있었다. 정말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돈이 별로 없다는 말을 했더니, 그럼 고른 햇살에 가서 먹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분식을 좋아하기도 하고 오천 원으로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앞에 도착하니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저녁 시간이라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모양이었다. 이십 분 정도 기다린 후 가게에 들어가 치즈 라볶이 한 개와 참치 김밥 하나를 시켰다. 둘 다 치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는데, 공감대가 생긴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음식이 나올 때 까지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물론 주제는 방금 다녀온 보육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어쩌다 버림받게 되었을까요?”


보육원에서 들었던 그녀의 말이 기억나 그대로 질문을 건넸다. 내가 수저를 세팅하는 동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골똘히 고민을 하다, 수저를 받더니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했다. 버림받은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녀가 가장 중점적으로 말했던 것은 부모의 능력 부족과 상황에 대한 지점이었다. 부모가 아이를 낳았음에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버려진다는 이야기였다. 보육원에서 자라는 것과 부모 아래서 자라는 것은 정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말해주었다.


“능력이 안되고, 상황도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이를 낳으면 안 되죠.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데, 생명을 무책임하게 방치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예요. 어쩌면 그렇게 낳는 상황이 온다면, 살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군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고들을 보며, 생명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던 나만의 답을 가감 없이 말했다. 누군가가 죽었을 때,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으며, 그대로 묻힌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개했기 때문이었다. 생명은 정말 소중하고, 어떻게 해도 그런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주문했던 음식들이 나왔다. 우리는 배가 고팠기 때문에 일단 참치 김밥을 한 개씩 입에 넣었다. 오물거리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이 들어 미소 짓게 되었지만, 오물거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아 먼저 말을 걸진 않았다.


“그렇다면 만약, 경제적으로도, 그리고 상황이 도와주지 않는데 의도치 않게 아이가 생겨버린다면 그럴 때는 어떻게 행동했어야 할까요..?”


생명이 소중하다는 하나의 사실로만 따져도 정답이 너무 명확하다고 생각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실한 내 의사를 전했다. 첫째로, 피임을 제대로 했어야 했고, 둘째, 피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생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부모가 안고 가야 할 책임이라고. 그 책임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정말 큰 죄라고 확실히 내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성범죄 같은 일방적인 상황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짤막하게 덧붙였다.


“생명은 소중하죠. 정말 소중해요. 그런데, 방금 말했듯이 서로가 불행한 미래로 흘러가게 된다면.. 그게 과연 그 생명을 위한 일일까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그녀에게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참치 김밥 몇 개를 더 먹었다.


“그리고, 성범죄 때문에 생긴 아이가 존재한다면.. 예외적인 방법이라고 하면 낙태나 아이를 낳고 보육원에 보내는 방향일 텐데, 그럼.. 그 생명은 소중하지 않은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하고 고민한다 해도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았다. 방금 내게 던진 질문은 내 일관적이지 않은 의견 피력에 대해 강하게 지적한 것이었다.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그 문장 안의 의미는 꽤나 날카로웠다. 나는 더 이상 일관되게 서술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 예외에서의 내 전제는 ‘생명은 동등하지 않다’라는 문장이었다. 범죄자의 자식은 아마도, 보육원에 보내져도 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아마도, 낙태해도 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식사를 끝마쳤다. 우리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짤막하게 조심해서 들어가라는 격식의 인사를 끝으로, 우리의 연락은 끊어졌다.


“어머니, 어머니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아이가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계속해서 연락이 되지 않는 것에 신경이 쓰였지만, 내가 잘못 말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확실했기 때문에 더욱 짜증이 났다. 그 날의 대화를 계속해서 되뇌었다. 생명이 소중하다는 그 말은 일관적으로 적용하기가 너무나도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 대화를 기점으로 수많은 자료들을 찾아보았지만, 당장 생명에 대한 해석도 천차만별이라는 사실만 계속해서 보일 뿐이었다. 내가 갇혀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났고, 다른 의견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화가 났다. 하지만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식사를 하는 도중 여쭈어 보기로 했다.


“어휴, 말도 마렴. 애 키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매일 울어대서 정신은 사납지, 뭐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너하고 너네 형도 얼마나 울어대던지, 진이 다 빠지는 줄 알았다. 그래도 네 아빠가 죽어라 일해서 그나마 여유가 됐지, 돈까지 없었어봐. 제대로 클 수 있었겠니? 결국 다 불행해지는 거야. 어쩌겠니, 막말로 낙태하거나 애 낳아서 보육원에 보내지 않는 이상은 반드시 힘들게 살아갔을 거야.”


어머니는 끔찍하다는 듯 고개까지 저어가며 말씀하셨다. 앞에 놓인 계란말이를 더 먹으라고 하시길래,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집어 입에 가져갔다. 어머니의 정성을 우물대고 있는 동안, 집 현관문이 열리더니 형이 들어왔다. 웬일로 밖에 나갔다 온 것일까. 형은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 무엇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집 안에 있어도 얼굴을 보기 힘든 사람이 형이었다. 당연히 방 안에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웬일로 나갔다 들어와?”


형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형은 버려진 아이들처럼 힘들게 큰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훨씬 유복한 환경에서, 더욱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해왔다. 그런데 형의 행동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고 보기 힘들었다. 심지어 예전에 있던 친구들도 모두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원인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대입 실패. 아마 재수를 했던 형에게는 대입 실패라는 사건이 정말로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대한민국 학생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 수능에서 실패를 했다는 것은 너무 힘든 벽이지 않았을까. 더군다나 동생인 나는 대한민국 최상위라는 학교에 들어왔으니, 더욱 비교하며 자신을 깎아내렸을 것이다. 그래도, 저 정도까지 형이 망가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얘, 밥은 먹었니?”


형은 평소 어머니가 하는 말에도 잘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후 형은 항상 혼자였고, 군대를 다녀와서도 혼자였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처가 얼마나 깊었던 것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는 형이 내 말에 응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형은 이미 죽은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 어머니는 형에게 일방적인 몇 마디를 던지시더니 식탁으로 돌아오셨다. 형이 정말 걱정된다는 표정이셨다. 도대체 형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하고 싶은 건 있는지 걱정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을 듣고 나도 궁금한 점이 생겼다.


“어머니, 혹시 어머니는 꿈이 있었나요?”


‘당연히 있었지’라는 말씀을 하시고 당신께서는 추억을 회상하는 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틀었다. 처녀였을 시절의 이야기부터 차근차근 말씀해 주셨는데, 어머니도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대학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여러 이야기를 하며 살아가고 싶었다고 하셨다. 공부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싶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결혼을 함으로써 모든 꿈들을 접었다고 하셨다. 꿈도 소중하지만, 우리도 소중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고 하셨다. 실제로 어머니는 대학원까지 졸업하셨으니, 그 결심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사회적인 모든 지위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가족에만 집중하겠다는 결정이 절대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머리가 복잡했다.


“제발 밥이라도 좀 먹어.”


괜히 형의 방에 대고 소리쳤다. 뭔가 풀릴까 생각했지만, 풀리는 것은 없었다. 내 방으로 들어가 방금 들은 이야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른 관점, 다른 이야기, 다른 시선에 대해서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덤으로 형에 대해서도 정리했다. 어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형의 이야기들을 조금씩 글의 형태로 정리해 나갔다. 정리하다 보니, 그녀에 대해서도 쓰기 시작했다. 항상 애기능 벚꽃나무 아래에서 읽고 있던 데미안. 싱클레어가 영혼의 인도자를 통해 자아를 찾아가는 이야기. 그 사람은 왜 이 책을 몇 번이고 읽고 있었을까. 자아를 찾고 싶었던 것일까? 어머니처럼 꿈이 있었던 것일까? 이끌어 줄 무언가 필요했던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을 직접 듣고 싶었다. 하지만 내 연락은 여전히 닿지 않았다.


“왜 맨날 이캠 쪽으로 가냐? 애기능에 수업도 없잖아.”


애기능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들르게 된 지도 2주가 지났다. 그동안 나는 그 사람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점심때만 되면 사라지는 날 보며 과 동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곤 했다. 자세한 사실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영혼 없이 웃으며 애기능 캠퍼스 식사가 맛있어서 밥이나 먹을 겸 가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가끔 같이 먹으러 가자며 나를 설득했지만, 그럴 때마다 정중히 거절했다. 이렇게 가다간 친구 한 명 잃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지난 2주일 동안 애기능의 벚꽃 잎들은 하나하나 떨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는 상태였고, 이런 삭막한 곳에 그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그 사람은 벚꽃 잎처럼 따뜻한 색깔이었는데, 지금의 애기능에서 그런 색깔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 사람을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애기능으로 향했다.


“벚꽃이 다 시들어 버렸네요.”


우리가 우연히 만났을 때, 내 입 밖으로 나온 첫마디였다. 드디어 만났다는 기쁨보다는,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물론 기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겠지만, 우리가 해야 할 대화는 아직 남아있었다. 기쁨은, 이 대화를 끝마쳐야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평상시보다 더 긴 정적이었다. 잘 지냈냐는 말을 건넸지만, 짤막하게 그렇다는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가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내 앞에 있는 분홍빛 사람과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무례하게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시간이 있냐고 물어봤다. 시간이 된다는 대답을 들었을 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모습을 본 그 사람이 살짝 웃는 것이 보였다. 어찌 됐든, 나는 그녀에게 그 장소를 한 번 더 가자고 말했다. 함께 노을을 바라봤던 다리 위로 가자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버스에 올라 다리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다리 위에 도착했을 때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 장소는 정말 신기한 장소인 것 같아요.”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조금의 말을 덧붙였다. 다리라는 장소는, 정말 여러 가지 감정이 많이 들게 하는 장소라고. 이 사람은 부정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라는 짧은 대답을 듣고, 가만히 앞으로 더 나올 말들을 기다렸다. 석양빛이 우리가 있는 장소를 비췄다. 무언가 말을 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난의 말이든, 사과의 말이든 말이다. 나는 이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이다. 내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녀가 먼저 나에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 석양이 지는 시간도 신기한 시간이죠.”


웃으며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다. 밤과 낮의 경계에 있는 시간이니까. 아마 지난번 석양 아래에서 말했던 현재와 미래 사이를 나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 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 있는 현재를 나타내고 있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고민하면서, 혼란스러워할 시간이니까 말이다.


“이 곳에 오면, 저는 부정적인 감정이 더 컸었죠.”


내 말에 크게 동요하는 표정이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이 다리 위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내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지난번 다리를 방문했을 때  풍경에 매료되었다고는 말했지만, 단순히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다는 이유였다면 오히려 슬퍼하는 표정을 짓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했다. 분명 이 자리에서 다른 일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예상했다는 듯 쓴웃음을 짓자, 자신을 떠 본 것이냐고 약간 화를 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 일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이 다리 위에서 겪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저도, 이 장소에서 뭔가 겪었어요.”


우리 집에는 형이 한 명 있다. 형은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이다. 소위 말하는 ‘은둔형 외톨이’라는 단어로 잘 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형이 이렇게 된 것은 5년 정도 전이었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형은 입시를 끝낸 참이었다.


“내가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시험에서 1등을 하는 것뿐이야.”


왜 형이 이런 사고를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렴풋이 추측할 수는 있었다. 형은 어릴 적부터 공부 외에 특출 난 재능을 보인 분야가 없었다.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간단한 박자조차 맞추지 못했고, 음은 들쑥날쑥해서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면, 선이 계속 흐트러지며 결국에는 무엇을 그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운동은 어떻냐고 물어보면, 형이 운동에 정말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동년배들은 형과 같은 편에 서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형이 다른 친구들과 어느 정도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적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존재감을 보이는 것이었다. 아마 공부 잘하는 학생이 학교에서 무시받지 않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아이들도 공부를 잘한다고 하면 크게 무시하지 못한다. 아마 이것이 형의 유일한, 자존감을 유지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다행히 형 주변에는 어느 정도의 친구는 항상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에도 몇 번 놀러 왔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너 따위가.”


형이 성격이 좋은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경쟁을 과도하게 의식해서 그런 것인지, 친구는 있어도 어느 정도는 다 경쟁자로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숨기기에 급급했고, 그런 부분이 드러나면 불같이 화를 냈다. 형이 분노에 가득 찬 상태일 때 나도 몇 번 불똥이 튄 적이 있었다. 이런 관계가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와 형은 멀어져 갔다. 지금 보면 멀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형과는 다르게 학창 시절의 성적은 조금 부족했지만, 형이 해내지 못하는 것들을 해내곤 했다. 달리기 1등, 미술 경시대회 동상 같은 것들을 하나 둘 해냈다. 같은 부모 아래에서 나왔다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상극이었다. 이런 속성 때문에 형이 항상 달고 살던 말이 하나 있었다. ‘너 따위’라는 단어였다. 결코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다. 아마 계속되는 이런 관계에 우리는 서로의 마음의 문을 서서히 닫았을 것이다.


“너 따위가 어떻게 나를 이해한다는 거야?”


이 다리 위에서 형이 나에게 분노에 찬 표정으로 던졌던 대사다. 형이 사라지는 사건이 한 번 있었다. 형의 1년간의 대입 재도전이 끝나고 난 뒤였다. 아마 형은 처참할 정도로 시험을 망친 것 같았다. 긴 시간 동안 자신을 증명할 방법이 이 뿐이라고 생각했던 형에게는 정말로 치명적인 결과였다. 나는 한강 다리 위에서 자살을 시도한다는 것이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항상 매체에서만 봐 왔던 장면이었는데. 절망적인 표정을 뒤로하고, 정말 분노에 가득 찬 어투로 소리를 지르던 형의 모습은 아직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사건은 다행히, 큰 사건 없이 마무리되었다.


“            “


그 후 한동안 우리 가족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조심스러운 집 안의 분위기, 형의 눈치를 보는 부모님의 모습은 내게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형 한 명 때문에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형은 나에게 이런 짜증을 뱉어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까. 그래도 시간이 약인지, 형은 어느 정도 밖으로 나다니기 시작했다. 아주 가끔, 어디론가 향하는 듯했다. 몰래 미행한 적도 있었다. 형이 어떤 일을 벌이면 분명 가족에게도 영향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형은 집 앞의 공원을 몇 바퀴 빙글빙글 돌 뿐이었다. 그런 모습을 몇 번 보고는 형이 사고를 일으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형의 뒤를 밟는 것은 그만두었다. 다행히 여태까지도, 어떠한 사고도 없이 무난하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말은 잘 하지 않지만.


“이곳에서 형은 사실 죽은 게 아니었을까요?”


내 장황한 이야기를 들어준 것이 정말로 고마웠다. 재미없을 수도 있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는 모습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나만 해도 그랬다. 나는 고른 햇살에서 이 사람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사실 형이 죽은 게 아니었다는 말에, 이 사람은 뭔가 알겠다는 듯 가만히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형의 생명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죽은 상태라는 생각이, 며칠 전 형을 보며 문득 떠올랐다. 어머니도 사실 꿈을 접는 순간, 사회적으로는 죽어버린 것 아닐까. 자식들을 돌봐야 한다는 그 이유들 때문에 자신을 찾지 못한 것 아닐까. 정말 불행한 가족이 아닐까.


“저도 여기서 세상과 연을 끊으려고 했었어요.”


이제는 이 사람의 차례였다. 이 곳에서 삶을 마감하려 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내가 과연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가만히 읊조리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이 왠지 위축되어 보였다.


“그 날의 노을은 정말 시리도록 슬프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노을이 사라지는 것처럼 제가 사라진다 해도, 저렇게 아름답게 사라지고 싶더라고요.”


슬픈 노을을 보며 자신의 목숨을 던지려고 했다는 말이 너무 안타까웠다. 하지만 강을 바라보며 말하는 모습은 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예전에 이 다리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고 했을 때, 석양빛이 눈에 들어왔다고 말해주었다. 밤에 몸을 던지기는 싫어서 해가 막 지기 시작하는 시간을 선택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석양이 아름답다는 생각에 차마 몸을 던질 수 없었다고 했다. 단순하게 예뻐서, 감성에 젖어서 멈춘 것은 아니었다. 사라지기 전의 노을은 저렇게 아름다운데, 그 당시의 자신이 초라한 존재라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발버둥 쳐 보자고 생각했다는 말을 끝으로, 그녀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제대로 된 이유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넘겨짚을 수는 없었다. 섣부르게 건넨 말이 오히려 상처가 될 수도 있기에, 또다시 말을 삼켰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해도 점점 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일단 자리를 옮기자는 제안을 했다. 그녀는 내 제안에 그럼 애기능으로 가는 것은 어떻냐고 물었다.


“애기능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아세요?”


맥주를 한 잔 하자는 말에, 각자 두 캔 씩 사 들고, 앙상하고 쓸쓸한 벚나무만 남은 애기능 동산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질문에 대해서 나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넘겨짚어보자면, 애기라는 단어와 능이 합쳐진 단어이니 아기의 무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추측을 전하니 반만 맞았다고 했다.


“조선시대에, 왕자나 공주의 태반과 탯줄을 보관하던 항아리가 있었다고 해요. 그 항아리가 이 부근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애기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아기의 무덤은 아니고, 태의 능이라는 것이죠. 그만큼 태반이나 탯줄은 성스러운 존재라는 의미겠죠. 무덤까지 만들어 줄 정도니까요.”


맥주를 마시던 그녀의 뺨이 벚꽃으로 피어올랐다. 약간의 취기와 함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모습은 벚꽃 잎의 색과 닮아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죄책감이 들었어요. 저는 생명을 소중히 하지 않았으니까요. 지난번 생명은 소중하다고 말씀하셨죠? 맞아요. 생명은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 행동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곳에서 있으면 계속해서 죄책감이 들어요. 그도 그럴 게, 여기는 생명의 장소잖아요? 그래도 꾸준히 이 곳으로 향했어요. 계속해서 생각을 멈추면 안 될 것 같았거든요.”


생명을 소중히 하지 않았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우리가 함께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되짚어 보았다. 우리는 보육원에 갔다. 우리는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버림받은 아이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들은 생명이다. 혹시나,


“저는 낙태를 했어요. 전 남자 친구와 사귈 때였죠. 피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생겼어요. 괴롭더라고요. 저는 그저 제 삶을 살아가면 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제 안에 생명이 있다는 이유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이 아이 때문에 앞으로 제가 꿈꾸던 삶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게 정말로 두려웠어요. 하지만 제 욕심 때문에 이 아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도 두려웠어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저는 정말로 힘들어했죠. 형편이 됐다면 어떻게 키울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경제적 형편도 좋지 않았고, 남자 친구라는 사람은 어느새 무책임하게 저에게서 멀어졌죠.”


그녀는 맥주를 다 마셨다는 것을 알았는지, 남은 맥주 한 캔을 따고 말을 이어갔다.


“네, 저는 결국 낙태를 했어요. 역시 그 후가 간단하지는 않더라고요. 단순히 낙태를 했다는 사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어요. 나 자신에게 잉태된 생명을 저버렸다는 죄책감과 아기에 대한 미안함이 계속됐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쉽사리 말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외로움까지 겹쳐져 우울증도 앓았던 적이 있어요. 아, 물론 지금은 좀 괜찮지만요. 끝없는 합리화의 연속이었어요. 내 삶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끊임없이 최면을 걸었어요. 아까 갔던 다리 있죠? 그 다리 위에서 목숨을 끊으려 하기 전에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서럽게 울면서 수십 번은 했던 것 같아요. 그때 다행히도 노을을 보게 되었죠.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제 잘못들은 온전히 제가 안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기서 허무하게 목숨을 끊어버린다면, 제 아이에게도 정말 몹쓸 짓이었겠죠.”


가방 안에서 데미안을 꺼냈다. 이 사람이 어떤 심정으로 읽고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죄책감 속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고스란히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 이 책은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을 보고, 이 사람은 조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그 책 덕분에 위안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힘들었지만, 온전히 제대로 받아들이자고 생각한 건 그 책을 읽고 난 뒤였어요. 아이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각오를 다졌어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았어요. 찾다 보니 갈 길 잃은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접했어요.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서, 제가 더 미안해져서 결국은 봉사를 하기로 했어요. 아이들에게 밝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부쩍 웃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죠.”


눈에 맺혀 있는 눈물을 보았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뺨에 반짝이는 무언가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많은 고뇌와 죄책감이 담긴 눈물일까. 나는 조용히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려운 이야기를 해 주셔서 감사해요. 고생 많으셨어요.”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 자체가 낙인이 찍힐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을 해 주었다는 사실에 큰 고마움이 느껴졌다. 옆에 앉아있는 이 사람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든 것처럼 보였다.


“아까 말씀하신 거, 어느 정도 눈치채고 그렇게 말씀하신 거죠?”


아까 다리에서의 대화를 말하는 듯했다. 의도적으로 말한 게 맞았기 때문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라는 사람이 사실 그때 죽은 것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씀하셨죠. 사회적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지난번 고른 햇살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어요. 생명이 끊어지는 것 만이 죽음이 아니라, 미래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것도 죽음이 아니냐며 묻는 것 같았어요. 그 말을 듣고 ‘이 사람이라면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어요. 지난번에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말할 수 없겠다고 강하게 생각이 들어서 정말 슬펐어요.”


이번엔 내 맥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고, 봉지 안에서 맥주를 하나 더 꺼냈다. 왜 슬픈 감정이 들었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는데, 의외로 담담하게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처음 대화를 한 날에는 정말 기뻤거든요. 저를 따뜻하게 보는 눈빛은 정말 오랜만이었어요. 예전부터 저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저를 바라볼 때 정말 따뜻한 느낌이 들어 위안을 많이 받았어요. 물론 처음 말을 걸 때 큰 마음을 먹어야 했어요. 다행히 제 말을 잘 받아 주시더라고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연락을 주고받는 동안, 나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는 이 사람은 꽤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죠.”


나에 대해 솔직한 평가를 말해주는 바람에 조금 부끄러워져서 애꿎은 벚꽃 잎만 만지고 있었다. 이런 말까지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고른 햇살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내가 서툴렀던 것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그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 들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조금만 더 조심스러웠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한동안 연락을 받지 않은 것은 죄송해요. 그 날, 역시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맞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화가 나지는 않았어요. 단지, 제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도망쳤을 뿐이었어요. 이해받고 싶어 하는 제 모습이 싫기도 했어요. 그래도 짧지만, 우리가 함께했던 몇 번의 순간들을 떠올려 봤어요. 즐거웠어요.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었고, 진심으로 대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은 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애기능으로 향했어요. 정말 다행히도, 우리는 마주치게 되었죠.”


연락을 받지 않은 이유는 어느 정도 예상한 대로였다.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내가 고개를 돌려버린 것 때문이었다. 그녀를 보니 무릎에 얼굴을 대고 조그맣게 흐느끼는 것 같았다. 이번에는 위로를 하고 싶어 이 사람의 손을 향해 내 손을 뻗었다. 내 손에 온기를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저는 형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항상 왜 저럴까, 제 생각대로 형을 판단하곤 했어요.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사실 제대로 물어보지 않았어요. 예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얼마 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너무 내 입장에서만 생각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우리 형제 때문에 대학 교수의 꿈을 포기하셨죠.”


내 이야기를 계속해서 경청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실 이 모습은 내가 진작 보였어야 했을 모습이었을 텐데, 내 앞의 사람이 날 이렇게 봐줄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소중하게 다가왔다.


“어머니가 일을 하셨다면, 우리 형제는 이렇게 자랄 수 없었겠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 시절, 희생이 없었다면 저희가 살아갈 수 없었겠죠. 그리고 이 사실은, 고맙다는 느낌보다는 당연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죠. 형이 1등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머니가 집에서 우리를 돌봐 주시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생명은 소중한 것도 당연하다.”


목이 말라 잠시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당연한 것은 많아요. 하지만 그 이면을 본다면, 당연한 것도 당연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어느새 당연한 것들이 하나하나 무너져 갔어요. 형이 시험을 망치고 자살을 하려 했고, 어머니는 사실 꿈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계신 것이었죠. 그리고, 태아라는 생명도 소중하지만, 이를 책임지는 사람들의 생명도 소중하죠. 하지만 어떤 것이 옳은 것이냐는 섣불리 말할 수 없겠더라고요. 형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어머니가 꿈을 포기한 것이 잘한 것이었을까요? 그리고 제 앞에 계신 당신이 낙태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잘한 것이었을까요? 당신과 태아의 생명 중 어떤 생명을 선택해야 할지. 이건 정말 가혹한 과제 아닐까요?”


날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이 더 떨리고 있었다.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겪을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식뿐인 위로를 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고생하셨어요. 그런 상황에서는 함께 이야기하고 책임을 졌어야 하는데, 혼자만 짊어지고 있으셨네요.”


그녀는 내 앞에서 눈물을 터트렸다. 안에 쌓여 있던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벚꽃이 다 떨어져 버린 벚꽃나무 아래에서, 이 사람은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애틋해서, 말없이 그녀를 꼭 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 작은 등으로 그렇게 무거운 짐을 들고 있었던 것일까. 주변에 흩뿌려져 있는 연분홍 꽃잎들이 보였다. 아마 우리는 다시 포근한 벚꽃을 피워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녀가 우는 것을 멈출 때까지, 조용히 안아주었다.






“나, 해외로 나가고 싶어.”


우리가 만나게 된 지도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애기능에서 그 대화를 한 후에 쭈뼛쭈뼛 고백을 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바람에 실망하는 나를 보고 그녀가 먼저 사귀자는 말을 꺼냈었다. 1년 전과 바뀐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졌다. 그 날 이후, 나도 몇 가지를 시도해 보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와 함께 보육원 봉사도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지낼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몇 번 가보다 보니 완전히 적응하여 아이들과 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전화로 ‘선생님, 제가 그림을 그렸어요!’라며 연락도 온다. 어머니에게 함께 공부하자는 제안을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교육학에 관심이 생겨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삶을 살아가던 도중 어느 날, 여자 친구는 나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유럽의 외로운 아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관광도 할 겸 보육원들을 돌아보고 싶다고 말을 했다. 왠지 지난 1년 동안 열심히 돈을 모으더니, 이유가 있었구나 싶었다. 좋은 생각이라며 함께 카페에서 유럽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다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조금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여자 친구는 나에게 잘 다녀오라며 안암역까지 배웅해 주었다.


“뭘 먹겠다고 밖에 나가자는 건데?”


집 앞에서 잠시 기다리니, 형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지난 1년 동안, 형에게 다가가려 계속해서 노력했다. 사실 처음에는 서로 험한 말도 오갔지만, 한 마디 한 마디 주고받다 보니 조금은 열리는 것이 보였다. 형제끼리 술 한 잔 하는데 일 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다니. 이렇게 힘들게 술 한잔 하는 사이가 있을까 의문이었다. 형은 여전히 날카로운 말투로 날 대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나와서 함께 시간을 보낼 정도면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다. 그냥 대충 치킨 한 마리 먹자며 우리 가족이 자주 가던 치킨 집으로 향했다.


“와.”


형과 내가 함께 내뱉은 말이었지만 의미가 달랐다. 형은 벚꽃 잎이 날리는 것이 짜증 난다는 의미였고, 나는 벚꽃 잎이 너무 아름답다는 의미였다. 역시 우리 형제는 다르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치킨 집 앞에 거의 도착할 즈음, 형에게 먼저 들어가 주문하라고 한 뒤,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벚꽃 잎이 날리면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이 벚꽃 향의 목소리는 항상 내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다. 유럽 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는 말과 함께, 잠시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다. 처음 만났던 때와 많은 것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빨리 들어오라며 호통을 치는 바람에, 에둘러 전화를 끊고 가게로 들어가려 했다. 바람이 한 번 강하게 불었다. 잠깐 뒤돌아 보았다.



벚꽃 잎들이 자유롭게 흩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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