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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기일 Jul 01. 2020

종강일기

    아직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조금 익숙하지 않다. 짧아봐야 나흘, 길어봐야 일 주의 시간동안 글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한동안 제멋대로 글을 쓰지 못했기에 이 자유로움이 익숙하지 않은 것일까.


    물론 - 이번 학기도 간단히 말아먹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 않는가! 다행히 수업 하나를 들으며 공부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단순 시험 성적만을 위해서 공부를 하지는 않았다. 보고서를 쓸 때, 누구나 다 쓰는 형식으로 제출하고 싶지 않았다. 반골기질이 심한 탓이었다. 그래서 짧은 이야기를 통해 의도를 전달한 후, 이에 대해 서술하는 방식의 보고서 형식을 사용하였다. 물론, 결과가 좋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된 어떤 것이 있다.


    현재 양화대교의 한적한 카페 가운데 앉아 있다. 다리 아래, 낚시꾼들이 분주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희한하네. 내가 알던 낚시는 시간을 낚는 행위였는데, 이 사람들의 낚시는 조금 다르다. 입질을 기다리고 있지도 않다. 우리가 알고 있던 생각과는 다르게, 낚싯대를 그저 홀로 남겨둔 채 어디론가 걸어가기도 한다.


    걷고, 또 걸어서 이 사람들이 어떤 목적지로 향하고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한적한 곳이 필요했을까? 아니면 낚시를 핑계삼아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것일까? 이상하다. 


    우리는 항상 보고서를 그 무엇보다 논리적이고, 감성을 최대한 배제한 채 써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항상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빈틈없는 사고를 적어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이는 분야 불문하고 어느 곳에서든 적용되는 원리이다. 물론, 수학이나 과학같은 영역에서는 이러한 미덕이 더욱 중요시될 것이다.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영어영문학 또한, 감상보다는 분석에 초점을 둔다. 우리는 초월주의에 대해,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불리는 사상들에 대해 배운다. 그리고 그 당시의 사람들을 비교하고 해체함으로써 의미를 찾는다. 영어가 이루어지는 현상에 대해서 공부한다. 문장을 일일이 뜯어 설명해내려 노력한다. 타인이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수많은 부가정보들을 추가한다. 군더더기는 있어서는 안된다. 치밀함과 그 요소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수많은 문서를 참조하고, 생각을 읽는다.


    하지만, 나는 감정의 영역에서 이 모든 것이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대립 구도에서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합리주의적 사고가 더욱 공감이 갈 수 있다. 논쟁이나 언쟁 따위를 할 때, 우리는 논리적 중시성을 더욱 중요히 여긴다. 감정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사람은 볼 가치도 없다 생각한다. 하지만, 단순히 필요 없는 감정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런 논리적 영역들에서, 감정이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 되느냐 묻는다면, 나는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생각한다. 사회를 움직이는 수많은 원인들은 감정이다. 자신이 차별받는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인권운동가가 될 수 있고, 남들을 치료하고 싶다는 따뜻한 마음에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질 수 있다. 싸움이 일어나는 원인은 서로 감정적으로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고, 복지가 이루어지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해서 따뜻한 생각을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무언가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불필요하게 들어간다면 타인들이 매우 불합리적인 행위로 간주해 모든 의견을 묵살당할 수도 있다. 아니, 묵살이 아니라 들을 가치가 없다고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수많은 분석은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 적용될 때, 단순히 논리적으로만 적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누가 보기에도 엄청난 기술이 어떤 천재 과학자에 의해서 발명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에 사람들은 박수를 보낼 것이다. 만약 이것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연구라면 사람들은 환호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기술들은 현실에 적용될 때 감정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느끼는 수많은 감정들이 있을 것이다. 기쁨, 혐오, 놀라움 등등 천차만별일 것이다. 이 기술에 대한 끝없는 토론이 이어질 것이고, 사람들은 결국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아나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감정은 논리가 현실에서 구현될 때 이 문제점들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꽤 많다는 것이다. 자동화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그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격렬한 반대가 나타난다. 기술을 무턱대고 적용해버리게 되면, 이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영향은 감정을 유발하여 세상에 표현된다. 

   

    자, 간단히 말하자면 감정이 유발되고 - 연구나 개발같은 논리적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 그 결과물이 사회에 적용되는 중 또다시 감정에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다. 감정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은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 영향력은 절대로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된다. 이과와 문과를 나누며, 취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리고, 나 또한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을 들고 싶다. 우리 사회는 이과와 문과 - 실용과 비실용으로 나누는 경향이 강하다. 가장 큰 인식이 있지 않은가, '문과는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과가 답이다' 라는 문장 말이다. 


    내가 앞서 언급한 나의 보고서에는 논리적, 감성적 접근이 모두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논리를 이용해 보고서를 작성한다 하면, 그것만으로는 세상에서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실제 사물로 구현된다 해도,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논리는 감정의 창구를 통해 현실에서 의미를 가지고 수많은 형태로 변주된다. 


    그리고, 현재 대학에서 배우는 인문학들은 학생들에게 이런 점을 제대로 전달해주고 있지 못한다 생각한다. 인문학이 가지는 그 실용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 못했을 뿐, 실제로 인문학이 가지는 범용성은 어마어마하다. 문학을 해체해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세상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단어와 상징이 받아들여지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해체해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어떤 양상을 좋아하는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인문학의 의미는 자력으로 알아내기에는 너무나도 힘들다. 누구도 가르치지 않고 추상적으로밖에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 이번에는 묻고 싶다. 저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버려둔 채 다른 곳으로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확실한 원리만을 통해 논리적으로 설명할 것인가? 

    혹은 불확실한 이 사람의 감정을 통해 설명할 것인가?

    그럼, 정답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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