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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루 Apr 03. 2018

북부, 그 끝에는

러시아 알혼섬 북부의 겨울

겨울 알혼섬에 오는 여행자들에게는 한 가지 미션이 있다. 바로 북부투어다. 눈이 내리고, 모든 것이 얼음이 돼 버린 섬의 모습은 어떨까? 블라디보스톡에서 보았던 해양공원과 마야크 등대 인근, 그리고 이르쿠츠크에서도 6시간이나 걸리는 알혼 섬의 바이칼 호수는 뭐가 다른 것일까? 같은 산이라도 같은 바다라도 어느 지역에서 어떤 시간과 세월을 보냈느냐에 따라 생김이 다르고, 담고 있는 이야기가 다르다. 마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도 같지 않은 것처럼.


나스티아가 배려해준 덕분에, 그리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운이 조금 더 섞인 좋은 날이었다. 오늘은 미니버스가 아니라 지프차였던 것이다. 대부분 알혼섬을 여행하는 경우 선택할 수 있는 교통수단은 버스와 지프이지만 두개를 고를 수는 없으며 아직까지는(2018년 1월) 여행자의 운이다. 알혼섬에서 어떤식으로 투어를 하는지 아무리 찾아봐도 확실한 내용을 알고 오기는 어려웠다. 모든 것이 새로웠고 하나하나 부딪혀 가야 할 것들이었다. 한국에서의 삶도 그렇지만 나고 자라지도 않아 공기조차 처음 맡게 되는 지역에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유리 아저씨는 전형적인 러시아인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여기에 하얀 수염을 길게 붙이고 빨간 옷을 입히면 산타할아버지라고 착각할 만큼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도 품고 있었다. 대신 그는 까만 비니에 파란 패딩을 입고 우리를 맞았다. 알혼 섬을 향해 출발했던 어제, 버스가 생각보다 늦게 왔기 때문에 '러시아 타임'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유리 아저씨는 정시에 호스텔 문앞에서 도착했다는 경적을 울렸다.

출발이다!

서둘러 신발에 발을 끼우고-쉽게 발을 끼웠다 뺄 수 있도록 등산 부츠를 헐겁게 조절해 놓았다-밖으로 나가보니 차디찬 냉동고 속으로 뛰어든 기분이었다. 어젯밤 알혼섬 최저기온은 영하 40도. 꽤 추웠다. 낮에는 해가 있으니 그나마 영하 30도까지 내려간다. 숫자만 보면 정말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이곳도 사람사는 곳이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얼음이 돼 옴싹달싹 못 할 것 같지만 대비를 하면 그렇지는 않다(겨울 한복 착장이 궁금하다면 맨 아래 참조).  내가 가지고 온 핫팩은 나의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휴대폰과 카메라를 위해 사용했다. 
유리 아저씨는 운전을 매우 잘 했다. 덜컹거리는 오프로드를 달리면서도 차체가 매우 단단하고 튼튼했기 때문에 안정적이었다. 어제 미니버스에 비하면 이코노미에서 비즈니스급으로 업그레이드 받은 상황이다. 마을을 초입구를 막 지났을 무렵, 차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미니버스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안타까움과 안도의 한숨을 동시에 내쉬는 순간이었다. 

유리 아저씨는 영어를 못하시지만 매우 친절한 분이었다. 출발하고 나서 혹 빠뜨린 것은 없는지, 중간에 가면서 간식을 먹을 필요는 없는지 끊임없이 우리를 챙겼다. 오늘 가야 할 거점은 총 3군데 이며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집에 들러 지도를 가져오기까지 했다. 언어라는 것이 사람간 소통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의이고 배려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여러 풍경이 우릴 지나갔고 그때마다 아저씨의 러시아 설명을 들었다. 알아듣지 못해도 뭐가 중요한가. 뭔가 특별한 위치에 우리가 도착했다는 것이 제일 의미있지.

*러시아 알혼섬 북부길_Russia Olkhon island_north 
https://youtu.be/Ln-TciQ9y_k

                  %22https%3A%2F%2Fi.ytimg.com%2Fvi%2FLn-TciQ9y_k%2Fmaxresdefault.jpg%22&type=ff500_300"                            러시아 알혼섬 북부길_Russia Olkhon island_north          2018년 1월 21일, 러시아 알혼섬 북부를 향해 출발 https://blog.naver.com/redmirr80          youtu.be        




, 양, 혹은 영혼이 머무는 곳

몽골에 갔을 때, 길다란 나뭇가지에 색색깔 천을 묶어 놓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무당인 버, 앙하르가 자신이 모시고 있는 할아버지에 빙의됐을 때, 그가 입었던 옷에 있는 색깔과 같은 것이었다. 러시아는 몽골 바로 윗쪽에 있기 때문에 약간의 문화적 접점이 있다. 그렇기에 알혼섬에서 만난 작대기들은 내게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에는 해가 둥실 떠 있고 빛을 받으며 서 있는 드넓은 벌판에 기둥. 붉은색, 흰색, 녹색등 천으로 감싸놓은 모습은 몽골 여행을 떠올리게 했다. 


평화

유리 아저씨는 우리가 사용하는 번역기를 통해서, 그리고 아주 짧게 알고 있는 영어단어를 사용해 최선을 다해 설명해 주었다. 이곳은 말과 양과 야크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여기에 묶어 놓기도 하고, 사람을 기다리기도 하고. 많은 동물들이 오가는 정거장 같은 곳이다. 겨울이라 동물들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오랜기간 해를 보며 서 있는 색색빛깔 천을 두른 기둥이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다. 몽골인들이 이것을 보았다면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해를 좋아하는 말과, 알혼섬의 공기를 좋아하는 소와, 이들의 일상을 사랑하는 어떤 동물의 영혼이 머물다간 곳일지 모른다. 이후에 만난 러시아 친구 일리야는 천 색깔에 모두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흰색이다. 뜻은 평화. 내 이름을 러시아어로 번역했을 때와 같은  의미다.

알혼섬을 찾는 중국인 여행객들이 참 많았다. 하나같이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친구들이었다. 우리를 보고 다가와 함께 사진찍기를 요청했는데, 특별히 우리의 외모나 어떤 점이 눈에 띄어서라기 보다는-내가 입은 옷이 전통스타일이냐고 묻기는 했다- 함께 같은 장소를 거쳐간 공감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 듯 했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고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소개할 필요도 없이 함께 여기에 와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우리를 즐겁게 했다.



몸을 녹여주는

차 내부는 참 따뜻했다. 유리 아저씨는 우리가 추운지, 춥지 않은지 틈틈히 계속 체크를 했다. 특별히 손가락 이나 발가락 같은 말단 부위가 모두의 속을 썩였다. 나는 등산부츠라 가장 상황이 나은 편이었지만 뀨는 워커(전투화나 다름없다고 얘기했다)를, 연은 그저 운동화에 수면양말이었다(물론 발에 핫팩을 붙였다). 가벼운 동상에 걸리는 것도 여행 중 매우 신경쓰이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각자 몸을 살피는데 애를 썼다. 확실히 깊게 쌓인 눈이 많은 곳을 지나는 여행이라 등산부츠는 내내 좋은 친구가 돼 주었다. 어디고 거침없이 성큼성큼 걸어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면양말이 아닌 등산양말을 신은것도 신의 한수였다. 수면양말은 보행에 적합치 않다. 걸으면 걸을수록 발바닥으로 내려와 걸쳐지기 때문에 꽤 불편하다. 그러므로 발에 딱 붙어 있고 보온과 땀흡수가 용이한 등산양말은 여러모로 쓸모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처음부터 유리 아저씨와 대화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반에 점심을 떼울 작은 간식들을 준비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평평한 산등성이에 차를 몰고 올라가 휴식을 취하자는 제스춰를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차 트렁크 나무상자 안에는 우리를 위한 점심식사가 가득 들어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알혼 섬 내부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마다 섬 내부 3개 거점을 돌아본다는 것 외에 특별히 정해진 기준은 없는 것 같다. 유리 아저씨는  아내분이 정성스레 만들어주신 따뜻한 음식을 자신있게 선보였다. 고기와 옥수수, 양배추, 토마토 같은 것들로 만든 꽤 묵직한 스튜로 식감도 그렇고 맛도 그렇고 최고의 식사였다. 빵은 다소 딱딱하고 질겼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알혼섬에 들어와 맛본 음식 중 가장 맛있는 것이었다. 지금도 아쉬운 것은 아저씨에게 점심 식사가 정말 최고였고,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식당을 세워도 될것 같다는 말을 해주지 못한 것이다. 물론 점심식사에 대한 감사인사를 충분히 했지만, 이후 이야기는 제대로 전할 수 없었다. 우리는 차에 오르내리고, 추위를 버티는 데에만 많은 체력을 소비했다. 하지만 이 한 끼 식사로 하루에 필요한 에너지원을 모두 공급받을 수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모두 호수다. 똑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차를 타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다른 모습의 바이칼 호수가 나타난다. 어떤 곳은 투명한 물이 그대로 얼어붙은 모습이지만, 다른 곳은 위에 눈이 쌓여 녹지 않아 그저 평지같다. 차를 타고 휙 지나가 버리는 곳도 있었지만 내려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생명이 모두 멈추어버린 것 같았지만 여전히 물 속에는 잠자고 있는 수 많은 심장들이 있다. 봄을 기다린다고 표현하는 것은 지금 알혼섬의 모습을 깎아내리는 것 같다. 알혼섬은, 충분히 지금을 즐기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그랬든.

알혼섬 바이칼 호수는 차갑지만 따뜻했다. 환경은 매서웠고 모든것을 얼릴태세였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러시아 알혼섬 북부 거점_Russia Olkhon island_north 
https://youtu.be/-4J90k_I8XI

                  %22https%3A%2F%2Fi.ytimg.com%2Fvi%2F-4J90k_I8XI%2Fmaxresdefault.jpg%22&type=ff500_300"                            러시아 알혼섬 북부 거점_Russia Olkhon island_north          2018년 1월 21일, 러시아 알혼섬 북부거점에서 https://blog.naver.com/redmirr80          youtu.be        







*러시아 알혼섬 바이칼호수를 가로질러_Russia Olkhon island_Lake Baikal 
https://youtu.be/TQt_999P22s

                  %22https%3A%2F%2Fi.ytimg.com%2Fvi%2FTQt_999P22s%2Fmaxresdefault.jpg%22&type=ff500_300"                            러시아 알혼섬 바이칼호수를 가로질러_Russia Olkhon island_Lake Baikal          2018년 1월 21일, 러시아 알혼섬 북부, 바이칼 호수를 가로지르다 https://blog.naver.com/redmirr80          youtu.be        

나의 오늘 착장은 솜 속바지, 솜 단속곳을 입고 니트 패딩한복에 모직저고리, 원피스 깔깔이에 액주음포 패딩을 입었다. 여우털이 달린 휘항을 걸치고 두겹으로 단단하게 만들어진 러시아산 니트 장갑과 등산양말 두겹, 등산부츠. 여기에 볼끼도 잊지 않았다. 추위를 이겨낼 수 있도록 특별하게 제작한,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나의 한복이다. 여느때라면 내복 몇 겹에 기모타이즈도 신었겠지만 이 착장에는 그런것들이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추위에 완벽 대비할 수 있는 현대판 겨울한복 스타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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