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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루 Mar 13. 2018

열차안에서, 파티를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횡단열차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역에 정차한다. 대도시 혹은 소도시에 정차하며 짧게는 2분, 길게는 50분 남짓 열차가 멈춰선다.  그때마다 빈자리가 채워지거나, 사람이 나고 들며 새로운 에너지로 가득 찬다. 어떤 사람들이 내가 있는 칸에 들어오냐에 따라 느낌이 매우 달라진다. 20대 친구들이 많이 탑승한다면 당연히 설레는 분위기로 가득차고 연령대가 있는 분들이 오신다면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된다. 디모페이 아저씨가 내리고 난 다음 우리가 만난 사람은 고려인 리아저씨와 그 주변에 있던 러시아 여행객들이었다. 


리 아저씨, 그리고

아저씨는 매우 호탕한 분이었다. 뀨가 먼저 인사하여 한국 여행 사진을 자랑당한 터라 나도 궁금해 인사를 드리러 갔다. 아주 약간 한국어를 구사하는 아저씨는 아내 리옌나씨와 한국 여행을 온 적이 있다 말했다. 거제도에서 일을 하고 이후 부산, 서산, 김해, 통영을 누빈 사진을 열심히 보여주셨다. 언뜻 보면 한국인이나 다름없는 외모에 영락없이 수더분한 한국 아저씨와 같은 성격이었다. 리옌나는 다소 수줍음을 탔지만 친절하고 사려깊은 분이었다. 처음에는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여행 그룹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처음 만난 것이라 하셔서 더욱 재미있었다.  한국 여행 사진 속 한글간판을 읽어드리자 아저씨와 리옌나는 그때 추억을 회상했다.  
나스티아는 딱 봐도 러시안 아가씨였다. 머리색이 검고 뭔가 펑키한 분위기. 언제나 이어폰을 꽂고 있어 조금 차갑게도 느껴졌다. 자기만의 색채가 뚜렷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그녀와 인스타그램 친구가 되기 위해서 여러차례 검색을 해야했다. 그녀가 잘 검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트이덴은 이 중 유일하게 영어를 구사했다. 막 유창하지는 않아도 생존영어를 하는 나와 비슷하게 대화가 통했으니 얼추 어깨를 견주는 실력이라고 해두자. 트이덴은 조금 수줍었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선하고 부드러운 인상이 매력적인 그는 매우 동안이었지만 이미 결혼을 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국',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자'. 공통 관심사는 그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작은 교집합으로 이렇게 빨리 사람간 경계를 허물수 있는 공간은 이 세상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 뿐일 것이다.



금기된

횡단열차 내 3등석에서는 주류를 마실 수 없다. 그러나 러시아 분들은 몰래몰래 술을 숨겨와 자기들끼리 분위기를 돋우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물론 대놓고 마실수는 없다. 2등석 쿠페에는 4인실로 문을 닫을 수 있어 술을 마셔도 된다고 한다. 어쨌거나 현지인들은 그런 규정들에 그리 연연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 러시아라는 나라에 상당히 긴장하고 있던 우리들은 술을 마시는 것을 처음부터 생각지 않고 있었다. 리 아저씨는 우리가 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자 마음 먹었다는 듯 자신의 커다란 캐리어를 뒤지기 시작했다. 여러 층으로 겹겹이 쌓인 캐리어 속에서 나타난 것은 40도가 넘는 러시아 보드카였다! 아저씨는 우리의 스타칸을 모두 가져오게 한 뒤, 보드카를 부어댔다!!
식탁에는 훈제 돼지고기, 쪽파, 오이같은 것들이 차려졌다. 내가 블라디보스톡 마트에서 구입한 러시아산 거봉도  함께였다. 리옌나와 리 아저씨는 고기와 오이를 가지런히 썰어냈다. 나는 술을 못한다. 술을 일부러 안 마신다기 보다는 분해효소가 없고, 알콜이 흡수됐을 때 몸 상태가 좋지 않다. 그리고 내게 술은 맛 없는 쓴 소독약이다. 그러나 아저씨는 내게 폭탄과 같은 말을 던졌다.


소주 물! 보드카 술!



이 얼마나 청천벽력같은 말인가! 난 그의 호의 뿐 아니라 한국인의 긍지를 위해서라도 마셔야 했다. 양은 소주 한컵 반 정도의 양이라 결코 적지 않았지만 물처럼 입 속에 털어넣었다. 트이덴은 연과 뀨를 통해 나의 평소 주량(?)을 들었기 때문에 바로 오렌지 음료를 건넸다. 술의 양보다 수분을 많이 섭취해면 큰 탈은 없을 거라는 리 아저씨의 말을 뒤로 하고 매우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리 아저씨는 보드카를 마신 후 오이를 코 밑에 대고 호흡하라 했다. 마치 코로 오이를 빨아들이듯 깊게 오이향을 들이키고 그 다음 입에 넣었다. 훈제 돼지고기, 쪽파,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내 입속에 밀려들어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은 나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나를 본 트이덴은 물을 건네주었다. 

'탁'
차장님은 청소도구를 들고 우리쪽으로 오셨다. 아저씨의 다리를 빗자루로 치며 러시아어로 뭐라 말씀하신다. 분명, 다리사이로 숨긴 보드카 병을 본 것이다. 그러나 리 아저씨의 표정은 능글능글한 얼굴로 그녀를 본다. 리 아저씨에게서 알수 없는 연륜과 여유가 느껴진다. 그리곤 다행히 아무일이 없다. 차장님은 또 다른 쪽 복도 청소를 하러 빠져 나간다.



위기

괜찮나...? 정말 몇 년만의 술인데 괜.... 10-15분 정도가 지나자 가슴이 뜨거워지며 내 내장들이 벌떡이기 시작했다. 모든 장기들이 쿠데타를 일으킨듯, 자기 주장을 함과 동시에 언제나처럼 음주 후 느꼈던 욕지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찬 바람을 쐬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언제나 술을 마시면 생각하는 방법- 당연히 소용이 없었다. 토하는 것은 정말 싫다. 순리대로 아래를 향해야 하는 음식물들이 거꾸로 나오는 순간은 정말 끔찍하다. 화장실에 가 앉아도 있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해 내 자리로 들어와 침구를 비스듬히 기대 누웠다. 또 10분이 지났을까, 아까보다 더 큰 폭풍이 몰려왔다. 이 여행을 안전하고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이러다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시작됐다.  'I'll dead. I can't drink alcohol.'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죽을 것 같다. 나머지 여행 일정들이 눈 앞에 스쳐갔다. 나... 무사할 수 있는 걸까. 이대로 어떻게 돼 버리는 것이 아닐까.

고통스러웠다. 이대로 죽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워졌다. 그런 나를 뀨가 걱정스레 보고 있었다. 그가 건넨 효소 약을 손에 들고 살짝 망설였다. 뭐든 먹으면 바로 쏟아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라는 기대로 꾸역꾸역 2알을 먹어 삼켰다. 탄산수였지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제발, 제발. 눈물이 고였다. 내 몸이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해소

조금 엎드려 호흡을 골랐다.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몸을 식히려 살얼음이 언 창문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안정을 찾는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 마약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구가 매우 빠른 속도로 빙빙 돌고 있었다'는. 난 마약을 하지 않아도 보드카로 마약을 맛 봤어. 토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야. 정말로. 

*러시아는 공공장소의 음주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현지인들은 조금씩 음주를 하지만 외국인의 경우 차장님을 통해 철도경찰에 넘겨질 수 있습니다. 모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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