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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밀밭 Jun 04. 2021

버지니아 울프가 강조한 자기만의 방이 될 수 있을까

작업실이 여의치 않으면 네 책상이라도 반드시 마련해야 돼

 음악을 선곡하여 고요한 공간을 깨운다. 캡슐커피를 내리고 거실 한 켠의 테이블로 가져와 노트북을 펼친다. 깜빡이는 커서는 까맣게 자국을 남기며 오른쪽 아래로 전진한다. 타닥 타닥-. 생각과 마음이 글자가 되어 찍히는 소리가 세포를 일깨운다. 주어진 시간은 오전 9시부터 12시. j씨는 이 고통스럽고 즐거운 시간을 사랑한다. 그마저도 일주일에 두어 번 주어지는 게 전부다. 마음껏 누려보지 못하기에 더 귀하게 여겨지는 걸까. 시간은 금방 흐르고 12시가 되면 노트북을 닫아 서랍에 넣는다. 노트와 필기구를 정리하고 커피잔을 씻어 엎어둔다. 귀가한 아이들의 그림도구와 장난감으로 채워질 테이블을 비워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2020년 1월에 시작된 코로나로 고대했던 3월의 개학은 오랫동안 기별이 없었다. 이후에 조심스런 등교가 시작되었지만 3일에 한번 꼴로 등교를 하게 되었고 금세 여름방학이 왔다. 2학기가 시작되었지만 개학 같지 않은 개학의 상태가 이어지더니 다시 겨울방학이 왔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빈집에서 글을 쓰던 j씨에게 작업중단의 상태가 길어지고 있었다. 코로나로 식당이용을 자제하라는 회사측의 권고에 발맞추어 매일 아침 남편의 도시락을 싸고 아이들의 세 번의 끼니와 두 번의 간식을 챙긴다. 온라인 수업과 숙제를 챙기고 장보고 집안청소를 하고 나면 하루의 끝을 만난다. j씨에게는 작년에 시작된 겨울방학이 새해가 밝도록 이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지인에게 안부전화를 받았다. 그는 일 년에 한두 권씩 부지런히 책을 내는 인기 동화작가였고 그의 아내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부부사이에 아직 아이는 없었다.  


“ 요즘 어떻게 지내? ”

“ 아이들과 부대끼며 온 종일 밥하고 지내. ”

“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어? ”


j씨는 피식 웃고 말았다. 


“ 못하지. ”


전화기 너머 오랜 지인의 j씨를 향한 측은함이 느껴졌다. 


“ 너는 꼭 작업실을 구해야 해. ”

“ 작업실은 무슨. 혼자 있을 수야 있다면 거실의 테이블로도 충분해.”

“ 그런 걸로는 안 돼. 작업실이 여의치 않으면 네 책상이라도 반드시 마련해야 돼. ”


j씨는 역정을 냈다.


“ 책상 비슷한 게 있다니까. ”

“ 그 책상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 작가들은 자존감이 떨어지기 십상이지. 너도 잘 알잖아? 매일 작업하다 보면 내가 누군지 뭘 하고 있는지 방향을 잃을 때가 많아. 그래서 자기만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환기해야 하는 거야. ” 


j씨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다 옳았음으로.


“ 너는 워킹맘이잖아. 너만의 공간이 필요해. 최소한 너만의 책상이라도. ”


j씨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 너는 워킹맘이잖아...”

“ 너는 워킹맘이잖아...”

“ 너는 워킹맘이잖아...”


그의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래. 나는 워킹맘이다. 수입이 발생하지 않고 글을 쓴다고 결과물이 나오지 않지만 남편과 아이들을 챙기고 집안일을 하는 것 외에 그녀의 상당부분은 글쓰기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동안 그녀는 스스로를 알아봐주지 않았구나. 나를 인정하지 않았구나. 그래 나는, 나는 워킹맘이다.      


아이들 책상과 책장으로 빽빽한 방을 둘러보았다. 과연 여기에 나만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까. 책장을 낑낑대며 이리 끌고 저리 끌며 구조를 변경해보았다. 세 번의 시도 끝에 창가자리에 책장을 파티션 삼아 너비 800센티 짜리 최소의 책상을 넣을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곧장 책상을 주문하고 장시간 공부에 적합하다고 광고하는 의자도 구입했다. 책상과 의자의 배송기간은 2주라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책장너머 숨은 공간에 들어가서 빈 자리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 곳은 버지니아 울프가 강조한 자기만의 방이 될 수 있을까. 지인이 일러준 작가로서 자존감을 지키는 최소한의 책상이 될 수 있을까. 주어지는 시간이 일주일에 두 번, 고작 하루 세 시간 일지라도 부디 잊지 말아야지. 깜빡이는 커서가 전진하는 시간. 까만 자국들이 타닥타닥 채워지는 시간. 그 괴롭고도 즐거운 시간을 사랑하는 나를. 글을 쓰는 나를. 워킹맘인 나를.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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