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동아줄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 쓰고 있는 휴대폰 번호는 5년쯤 되었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서 일부러라도 자주 번호를 바꾸는 세상이지만 번호를 바꾸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바꿀 계획은 없다.
이 번호를 가지고서 만난 사람들이 많다. 대학에서 만난 선후배. 일하면서 만난 동료들. 사랑했던 사람들. 싸우고 미워했던 사람들. 가족이었던 아빠도 있고. 그 아빠의 가족인 할머니도 있다. 이혼 후에 집을 떠난 아빠, 그 아빠를 착잡하게 바라봤을 할머니. 그 두 사람이 나와, 동생, 엄마의 안부라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내 전화번호다.
번호를 바꾸면 문자로 변경된 사실을 고지해준다. 아빠와 할머니가 그 사실을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못한다면. 그들이 죽고, 내가 사라질 때까지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운명과 기적이 없다면 서로 고립된 채로 바스러져 갈터다.
아빠와 할머니. 나와 동생과 엄마. 지금 이렇게 둘로 나뉘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어느 쪽도 명백한 잘못은 없다. 이야기하지 못한 사연, 이해받지 못한 감정. 표현할 수 없는 고통, 방향을 잃어버린 노력. 조금씩 어긋났던 삶이 연결되고 연결되어서 멀어졌다.
그렇다. 나는 그들이 단절되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에 만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작고 작은 삶의 상처들이 연결되고 연결되어서 멀어졌을 따름이다. 어떤 연결은 서로를 떨어뜨린다. 연결될수록 가까워진다는 믿음은 단편적이다.
그들이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 수십 년 연결의 결과는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그래야 하지만. 삶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동아줄 정도는 필요하다. 너무 거창한 생각이지만. 바뀌지 않고 남아있는 내 번호가 그 동아줄이 되었으면 한다.
전자기기에 고유번호를 지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그 세상이 도래한다면 '번호'는 자연스럽게 지워지겠지만, 그전까지 내 의지로 지워버리는 않을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