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어린이. 하나의 우주. 하나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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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영하는 "한 인간 안에는 하나의 우주가 있다"라고 했다. 김영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 인간은 하나의 세계다'라고 주장했다. 소설가 김영하는 '우주'라고 할 만큼 한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삶은 대체될 수없이 고유한 것임을 설파했다. 어떤 사회학자는 '인간이 세계다.'라는 문장을 근거로 타인의 존엄을 짓밟아서 안된다는 '인권'의 기둥을 세우고자 했다.
한 사람이 하나의 우주 혹은 세계라는 생각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한 인간의 삶이 그 어떤 다른 이의 삶과도 같을 수 없다는 것에 누구나 동의한다. 인간은 누구와도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오로지 자신 앞에 놓인 하나뿐인 길을 걸어갈 뿐이다. 그래서 나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는 타인의 삶을 그 자체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타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차원에서 홀로 버텨내고 있는 것이 누군가의 현재다. 그 타인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능력이 부족한 '어린이'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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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어린이와 '함께'하는 독서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어린이를 독서교실에 와주는 '고객'으로 대한다. '고객'이라고 해서 어린이를 단순한 돈벌이 수단으로 취급한다는 뜻은 아니다. 작가의 책에서 나오는 예시가 있다. 작가가 어느 서점에 가서 계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린이와 아빠로 보이는 남성이 함께 책을 구매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남성이 어린이에게 계산을 하기 위해 책을 달라고 했다. 어린이가 책을 쉽사리 넘겨주지 않았다. 카운터에 있던 사장이 어린이에게 '계산해드릴까요?'하고 물었다. 어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계산대 위에 책을 올려두었다. 작가는 그 모습에 큰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어린이는 물건을 구매하려고 해도 '고객'으로 조차 취급받지 못했던 것이다. 작가가 어린이를 '고객'으로 대한다는 것은 적어도 어린이들이 독서교실에 참석하기 위해 쓰는 비용과 에너지만큼이라도 존중하기 위해 애쓴다는 의미다. 어린이를 존중하기 위해 애쓴다는 작가의 겸손한 표현이다.
독서교실에 오는 어린이의 외투를 받아주고, 대화할 때는 항상 경어를 사용한다. 도움을 줄 때에조차 어린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꼭 물어본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어른'들이 보기에 작가의 행동은 과하다. 더 나아가서 '버릇없는' 아이로 길러내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도 들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어린이는 대화의 대상이 아니라 훈계의 대상이고, '철부지 코흘리개'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는 것은 '오냐오냐'하는 버릇없는 인간으로 길러내는 지름길이라고들 생각하니까.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의 '어른'과는 다른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존엄한 대우를 받아본 사람만이 타인을 존엄하게 대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로, 어린이들이 하나의 인간으로 존중받는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애쓴다. 어린이의 행동을 어른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의 고유한 삶의 경로 위에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 처음 묶어보는 신발 끈이 익숙하지 않은 어린이에게 무작정 다가가서 동의 없이 신발 끈을 묶지 않는다. 어린이에게 다가가서 물어본다.
"괜찮으면 신발 끈 묶는 일을 도와줘도 괜찮을까요?"
그러자 어린이가 답한다.
"괜찮아요. 저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들처럼 빨리는 묶지 못하지만, 묶을 수 있어요. 어린이라고 묶지 못하는 게 아니라, 조금 느릴 뿐이에요."
어린이의 의사를 존중해 준다. 신발 끈을 묶는 어린이를 기다려준다. 재촉하지도, 무시하지도 않고 조용히 기다려준다. 그러고는 어린이의 말에 배우고, 감동받으며 부끄러워한다. (실은 책의 가장 큰 묘미는 부끄러워하고, 분노하고, 침울해하고, 사랑스러워하는 작가의 가감 없는 감정 표현이다. 읽는 내내 웃고, 울고, 침울해하는 그 마음에 나도 함께 감정의 널뛰기를 하며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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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작가가 만났던 어린이는 '연령이 낮은 사람'이지만, '어린이'라는 표현은 꼭 연령을 기준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주린이(주식+어린이)', 배린이(배틀그라운드 + 어린이)와 같은 표현 속에서도 알 수 있듯 '어린이'라는 말은 연령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가진 일의 숙련도, 경험과 정보의 상대적 부족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쓰인다.
이처럼 어린이는 부족한 존재로 묘사된다.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되면 부족한 부분이 채워진 존재가 될 것이라는 신화가 어린이를 '철부지'로 그린다. 어린이는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지 않는다. 매순간 고민하고 판단한 끝에 성장한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그런 어린이의 삶은 어른이 된 사람의 시선으로 판단할 수 없다. 어른이 세상이 시커먼 물이 들어서 순수한 어린이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른과 어린이를 떠나서 존엄한 인간으로, 하나의 우주로서 나름대로 삶을 소화해 내고 버티고 있는 인간의 삶은 원래 타인이 쉽게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단순히 시간이 지나서 어른이 되지 않는다. 신발 끈을 묶는 순간, 입에 붙지 않는 말을 배워가려는 노력. 사랑하는 이와 만나는 기쁨과 헤어지는 고통을 겪고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고 않으며 성장하는 것이다. 조금 먼저 살아가는 존재인 '어른'으로서 어린이를 위해 해줘야 할 것은, 어린이가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고통만 겪을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정글 짐에서 떨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정도의 아픔만 겪을 수 있도록 푹신하게 깔려있는 모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