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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Sep 29. 2024

반드시 알아야하는 죽음.

나에게 가장 두려운 죽음은 아버지의 어머니, 친할머니의 것이다. 주변에 누군가가 죽는다는 사실이 무섭지는 않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나 역시 그렇다. 그 거대한 전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친할머니가 죽는다면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감당할 자신이 없다.


혈족공동체의 붕괴로 아버지와 연락을 끊었고, 간간히 할머니의 전화만 받고 있다. 할머니에게는 내 이름과 나이 외에 모든 것을 거짓으로 고하고 있다. 할머니는 내가 대전에 있는 어느 편의점에서 점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잔인하다고 생각하지만 할머니에게 나의 삶에 대해 진실로 말할 의무는 없다.


할머니가 둘째 아들의 이혼으로 마음대로 볼 수 없게 된 보석 같은 두 손자를 보기 위해서 무슨 만행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할머니는 손자를 보겠다는 마음으로 동사무소에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고 꽁꽁 숨겨두었던 엄마와 우리 형제의 작은 보금자리의 주소를 기어코 뜯어냈다. 그러고는 어느 날 대뜸 전화를 걸어서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우리 형제를 보러 올 수 있으나 둘째 아들이 한사코 말려서 일단은 돌아가겠다는 선전포고를 했다. 그 이후로 우리 동생은 번호를 바꾸어서 할머니의 연락을 차단했고, 나는 비극과 참사에 대응하기 위해서 할머니와 간간히 생존신고만 주고받고 있다. 물론, 살아있다는 것 외에 모든 것은 거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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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처럼 할머니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하지 않는 이유도 잔인하다. 그의 사망소식을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떤 식으로든 그의 장례식에 얼굴을 비춰야 한다. 만약 고의든 실수든 그 의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눈이 돌아가버린 나의 (전) 아버지가 숫돌로 잘 갈아둔 식칼이라도 들고 부산집을 피바다로 만들지도 모른다. (전) 아버지에 대한 나의 신뢰는 그 정도로 바닥이다. 길가는 이름 모를 수상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내 삶을 파괴시킬 수 있는 위험인물이다. 그의 화를 조절가능한 정도로 유지시키기 위해서 할머니의 장례식에는 꼭 참석해야 한다. 아마 그것이 빌어먹을 (전) 아버지, 그리고 이 씨 가문과의 인연의 마지막일터다. 


결혼식을 하더라도 그를 나의 결혼식에 초대할 계획은 전혀 없다. 결혼식은 그의 영역이 아닌 나의 영역이기에 양보할 생각도 없다. 그날은 칼을 들고 설치더라도 누구든 대신 칼을 맞든, 막아주든 할 테니 조금은 안심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하나다.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꼭 알아야 한다. 그 죽음의 의례에 꼭 참여해야 한다. 아니면 더 많은 이들의 장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너무 비극적인 사고인지도 모르겠지만, 내 비극적인 삶을 모르는 이라면 부디 조용히 하길 바란다. 아니면 나에게 일어난 만큼의 끔찍한 고통을 당신에게도 일어나길 힘껏 기도할 테니 말이다.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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