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주 차
임신하면 생기는 몸의 다양한 증상들에 대해 자세히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관심을 크게 둔 적이 없었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친언니들이나 친한 친구들이 임신을 했을 때에도 ‘임신’이 갖는 환상적인 이미지에만 취해 이런 아름다운 일을 해내는 그들이 부럽기도, 멋져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고생하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은 평소 가지고 있던 공감능력으로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지만. 임신을 통과하고 있는 지금의 나만큼 절실하게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속이 텅 빈 가짜 응원과 공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임신의 기쁨을 만끽하기보다 임신의 괴로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요즘. 나는 몸에서 보내는 다양한 원초적인 신호와 변화들에 매일같이 놀라고 있다.
가슴의 유륜이 빅파이처럼 커가고 있고, 겨드랑이도 점차 검은색으로 착색되고 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저녁에 눈을 감을 때까지 내내 울렁거림과 구토에 시달리고 있고. 배에 힘을 주거나 재채기를 하거나 구토를 할 때 눈치 없이 물총 쏘듯 나오는 소변 탓에 괴롭다.
이게 내가 경험하는 임신 증상 중 최악인 줄 알았는데. 임신 3개월을 넘어가니 대장이 너무 예민해져서 설사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 하루는 입덧이 너무 심한 탓에 병원 검진에 남편과 같이 갔다. 레몬 사탕을 먹다가, 민트향 껌을 씹다가도 가방에 넣어둔 검은 비닐을 언제 꺼내야 할지 모르는 밀려오는 울렁거림을 겪으며 혼자 병원에 다녀올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스나 지하철에 구토하지 않고 무사히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나오는 길. ‘이제 모든 일을 잘 해냈다.’는 안도감에 나는 조금 긴장이 풀어졌다. 평소 혼자 갈 때는 지하철에서 파는 빵이나 음식등에 관심도 가지 않았는데. 이날은 보호자와 함께라는 생각에 괜히 용기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의 울렁거리는 속에 따뜻한 어묵 국물과 매콤한 꼬마김밥을 넣어주면 가라앉을 것 같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여보. 우리 어묵이랑 꼬마김밥 먹고 가자.” 남편에게 제안했고 우리는 맛있는 군것질을 한 뒤 경기도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랫배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여보. 버스를 세워야겠어. 나 큰일 난 것 같아.”
남편은 “정말? 진짜 못 버티겠어? 진짜 안 되겠어?” 수차례 확인을 했고. 세 번째쯤 남편이 다시 물었을 때는 대답할 기운도 없어 고개만 끄덕이며 버스 손잡이를 꼭 잡았다.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내가 갑자기 화장실을 찾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혼한 지 막 1년 되었을 때쯤 외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차 안에서 갑작스러운 복통이 나를 찾아왔다. 정말 급하다는 나의 말에 남편은 “집까지 얼마 안 남았다.” 며 느적느적 여유 있게 운전을 했다. 그리고 “그래도 성인인데. 바로 그렇게 나오겠어?”라고 말했다.
연애 시절을 포함해서 남편에게 소리 지른 적이 없었던 나는 “나를 위해 뭐라도 하라고!!!!!!”라고 소리를 질렀고. 높아진 나의 목소리에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남편은 속도를 높여 차를 운전해 집을 향해 내달렸다.
내 손바닥이 축축해진 것을 느꼈는지 남편은 ‘나를 위해 뭐라도 하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남편인데. 두 번 다시 묻지 않고 안전벨트를 풀고 기사님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봤던 남편의 모습 중에 가장 믿음직하고 멋진 모습이었다.
한참 기사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나에게 돌아와 “기사님이 곧 나오는 톨게이트에서 내려주신다네.”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참자. 지금은 아니야. 정말 아니야. 하는 생각으로 온 정신을 집중했다.
기사님은 약속대로 버스를 톨게이트에 세워주셨다. 부끄러운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 “버스는 다시 못 타십니다.”라고 안내해 주셨고 우리는 “네. 네.” 조용한 대답을 하며 급하게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 도로공사 사업소의 화장실로 내달렸고. 우르르 쾅쾅 화장실과 복도를 짱짱하게 울리며 일을 해결했다. 평생 중 Top 5안에 드는 위기탈출의 순간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남편은 기사님에게 ‘임산부 아내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해서’ 버스를 세워주시길 부탁했다고 했는데. 임산부 아내의 응급상황 정도로 이해해 주실 줄 알았는데 화장실이 급하다는 것을 바로 눈치챈 기사님께서 “아니. 많이 급하시데요? 참을 수 없으시데요?” 하고 물으셨다고 했다. 남편은 그렇다고 답했고 기사님은 다시 묻지 않고 곧 내려드리겠다고 했다는.
이날 기사님 말고도 도움을 준 분이 계셨는데. 도로공사 사업소에서 일을 마치고 어느 길로 나가야 택시를 탈 수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던 우리를 향해 한 여성분이 다가오셨다. 사업소 직원분이라고 하셨고 택시를 고속도로 바깥으로 나가는 길로 안전하게 안내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직원분은 사무실로 들어가셔서 안전조끼와 경광등을 가지고 나오셨고, 꽤 긴 거리를 걸어 갓길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게끔 안내해 주셨다.
경기도 한 도시의 외곽. 낯선 곳에 도착해 택시를 잡아타고 온 우리 부부는. 오늘 정말 하루가 길었다 생각하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남편이 친구 같기만 했던 이전과 달리 진짜 든든한 나의 보호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아이를 갖기 전보다 훨씬 민감해진 대장 때문에 거의 매일 갑작스럽게 화장실을 찾아야 했다. 배 아파하는 나와 그런 나를 위해 어디에서든 화장실의 위치를 빠르고 정확하게 탐색해 주는 남편의 아슬아슬한 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