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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Oct 24. 2021

모든 것은 쓸모가 있다

변방의 필살기 1

준비 없이 혼자 남겨진 나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두 가지 길은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휴업'을 공지해 놓고 폐업 절차를 밟아 나가는 것과 앞으로의 일은 모르겠고 우선은 이번 주 영업일은 채우고 휴업 공지를 하는 것이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천근 같은 몸을 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장날이라 진입이 불가능한 식당 앞을 주차할 곳을 찾아 몇 바퀴를 돌았다. 길 건너 골목 구석에 간신히 주차를 하였다. 시동을 끄다 불현듯 '손님'이 떠올랐다. 오늘 같은 날 '손님'은 이 복잡한 길을 돌고 돌아 그마저도 겨우 주차를 하고서야 우리 식당에 올 수 있었다. 복잡한 속사정과 상관없이 문을 열어야 하는 당연한 이유를 비로소 알았다. 오늘은 영업일이고 불편한 주차를 감수하고 찾아오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헛걸음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식당으로 가는 골목길은 입구부터 왁자지껄하다. 이미 식당 입구도 난전으로 막혀있다. 당장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장면이 펼쳐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펄펄 뛰는 날것의 생존에 이골이 난 상인들이 가득한 거리다. 샌님처럼 살다 굴러들어 온 내가 혼자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훅-치고 올라온다. 불편한 소리를 대신해줄 누군가가 없다. 내 몫이고 내가 할 일이다. 심호흡을 하며 식당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 홀로 첫 영업을 시작하였다.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11시 30분에 문을 열고, 밤 9시에 문을 닫았다. 오늘은 목요일. 앞으로 4일 간 재고 물량을 판매하며 식당 내부 재정비를 위한 휴무를 공지한다. 내가 선택한 길의 첫 번 째 관문을 이제 통과할 차례다. 음식 제공이 늦어지는 것과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감출 수 없다. 오시는 손님에게 혼자 운영하게 되었음을 사실대로 공지하고 양해를 구했다. 어떤 손님은 그날 이후로 더는 만날 수 없기도 하였지만, 어떤 손님은 그날부터 친구가 되었다. 관계의 실패나 좌절은 누구의 삶에나 있을 것이고, 그때의 자신을 위로하듯 나에게 격려와 응원을 보태주었다. 그리고 식당의 sns 계정과 출입구에 붙일 잠정 휴업에 관한 설명을 담은 편지를 썼다. 몇 바퀴를 돌다 겨우 주차하면서 알게 된 손님들의 사정에 비로소 눈을 뜬 나는 '개인 사정으로 휴무합니다'라는 문구가 일방적인 무례함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너무 질척대는 감정이 묻어나는 글이 부담스럽겠지만, 휴업 중에 폐업을 결정하지 못하도록 흔들리는 나의 마음을 묶어버릴 결심으로 개인 사정을 밝히고 다시 문을 열겠다는 약속을 담은 편지를 썼다.


휴업을 한 약 3주 간의 시간은 마구 주무르고 패대기쳐야 도자기가 될 자격을 얻는 흙덩이가 된 것 같았다. 동업 해지 계약서에 날인하고 뒤섞인 주방 물품이 정리되는 동안 나의 마음이라는 것은 하도 짓밟혀 형체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동업자의 이전 주방에서 가져온 물품이 나가고야 식당에 나올 수 있었다. 실패의 역사를 성공의 밑거름으로 바꿔주는 짜릿함을 선물하고 싶어 그의 중고물품들에 품을 들여 이곳으로 가져왔었다. 곱게 새 단장한 욕실에 온수기를 설치한 바람에 타일이 깨졌다. 거두어간 온수기의 빈 자리에 드러난 깨진 타일의 볼품없는 모습처럼 나의 선의도 초라해졌다. 수건 한 장까지 자신의 물건이라면 모두 챙겨간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요구로 내가 구입해준 신발과 옷은 두고 갔다. 그렇게 두고 간 신발과 옷으로 그들은 자존심을 지켰지만, 나는 한동안 다루기 힘든 나의 모멸감과 싸워야 했다. 


혼자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재정비를 해야했다. 배치를 바꾸고 빠진 물건들을 새로 채워 넣었다. 그러자면 앞서 흔적들을 정리해야 했다. 좌절된 경험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물건들은 모조리 버리고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로 하였다. 감정에 눈을 가려 사실을 놓치는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기로 하였다. 다만 나와 맞지 않지만, 함께하는 이들이 원하는 것이라 지니고 있던 것들은 내려놓기로 하였다. 냉장고를 정리하다 동업자가 만들어놓은 소스를 발견하였다. 버리려다 손을 멈추었다. 그는 끝내 만들지 못한 비빔국수 양념장이었지만, 나는 이 양념장을 오징어채 볶음에 응용하기로 하였다. 얼마 전 숙성된 양념 맛으로 간을 한 오징어보다 가격이 저렴한 명엽채에 볶아냈다. 손님들의 비워진 접시를 보자, 모든 것을 쓰레기통으로 처박지 않은 그날의 내가 기특했다.

내가 운영하는 식당이므로, 내가 책임지는 주방과 홀을 구성하였다. 얼마 전에야 비로소 스테프들이 두고 간 신발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버렸다. 셔츠는 버리지 않고 내가 입고 있다. 이제 나는 감정과 사실을 구분하여 각각의 쓸모를 찾아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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