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늦된 사람 Mar 31. 2022

성실함은 기본값

모두 가보지 않은 길을 꿈꾼다

얼마 전, 친구는 아빠가 되었다.

친구와 오랜만통화하며,  출산 과정을 겪은 소감과 이 시기 남편의 역할 등으로 한참 이어진 수다는

자연스럽게 '현실 육아고민'으로 이어졌다.

휴직할 수 있는 친구가 주양육을 하기로 하였는데, 휴직기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는

참 막막하고, 개인적인 주제로 이어졌다.

원한다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으니 막막하고,

양육 철학-까지는 아니어도 양육의 방식과 각자가 놓인 처지와 조건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지극히 개인적이다.




친구는 그의 아내와 기질과 성향이 정반대이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아내와 달리, 그는 보수적이고 수렴적이다.

수렴적.. 이런 표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관찰한 그는 '수렴적'이다.

함께 모임을 하는 십여 년 동안, 모임을 이끄는 선생님의 웬갖 까탈스러운 요구가 담긴 제안들이 그의 손을 거쳐 현실로 구현되었다. 심지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 별로 잡음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는 없는 소양이라, (남편을 포함하여) 이 친구는 나의 신기한 관찰대상이었다.

이들의 특징은 주로 나와 같은 사람이 벌여놓은 일들을 우직하게 끝까지 마무리한다.




식당 단골손님과 모처럼 수다를 떨었다.

한 직장에서 자그마치(!) 20년을 장기근속하셨다고 한다. 그는 하고 싶은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며 사는 나의 삶에 응원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용기가 없어 '하던 것을 그저 하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 분 역시, 남편과 친구처럼 내게는 없는 소양을 지녔다.

하던 것을 그저 지키고 있는 것.


내게 대단하다고 말하는 그분께 나 또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는 무언가를 꾸준히 하신다는 것이 더 대단하게 느껴져요."




3월부터는 정식을 5천 원에 팔고 있다. 몇 그릇 파는 날도 있고, 하나도 못 파는 날도 있다.

얼마나 팔릴지 예상할 수는 없으니, 나는 늘 일정 양의 음식을 준비한다.

그리고 손님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업무와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는 등의 능동적인 일과를 함께 보낸다.

지금 현재, 내가 찾은 가장 최적의 상태이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목적이 뭐예요? 사람? 돈?"


왜 둘 다 아니었겠습니까 만은

결과적으로 둘 다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 닫지 않고 계속 가는 이유는?

답은 (이제는) 의외로 단순하다.

초라하고 별 볼 일 없지만, 내가 벌여놓은 일을 끝까지 마무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박수칠 때 떠나는 것을 콘셉트로 잡고 살았는데,

커튼 뒤에 무대를 정리하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못했다.

개업할 때 받은 화환과 선물. 그 물건에 담아 보낸 그이들의 응원과 격려.

성공으로 화답하면 더없이 좋으련만, 그러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성실로 응답하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친구에게는 아이를 낳고 귀농을 택한 우리의 선택이 너무 이질적이거나 극단적인 선택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친구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이 곧, 그때의 내 고민이었고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길 중 하나를 선택했을 뿐이다. 어느 길로 가든 '성실함은 기본값'이라는 것을 일찍 알면 알수록 결괏값이 풍성해지는 것 같다.

(기본값의 크기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 참 치명적이긴 하다.)


성실함이라는 기본값이 매우 높은 부류의 사람인 친구에게 나는 휴직기간을 모두 쓸 것을 조언했다.

사람이 꼭 승진과 성공만을 바라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런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책임감과 그 책임감을 뒷받침하려는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이런 태도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몸에 착 붙어서 그야말로 '무엇을 하든 책임감을 가지고 성실한 자세'로 임한다.

육아가 어디 호락호락한가?

그렇다고 일을 또 적당히 할 수 있는가?

내 몸뚱아리는 하나이고, 하루는 24시간.

선택할 수 있다면 본질적인 가성비를 높일 수 있는 역할에 집중하는 것이다.


어느 길을 택하든 아쉽다. 가보지 않은 길은 그 자체로 후회와 미련의 대상이 된다.

친구든, 손님이든,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가 가보지 않은 길을 동경하고 다른 길 위의 사람을 나와는 다른 부류라고 여긴다. 나만 그렇지 않아서 그런지 확인하고 나니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어차피 다 가볼 수도 없는 길.

다만, 내가 걸어온/걸어가는/걸어갈 길에 나의 진정성을 담아 한 발씩 디딜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늙은 거리의 희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