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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 Oct 0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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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마를 짜고 허리를 곧게 세워요. 어두운 진흙 속에서 둥근 모양을 내는 연꽃을 생각하면서요.

한 걸음 한 걸음 고요 속으로 들어갑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정성스레 내쉬어요.

눈앞에는 촛불이 일렁이네요. 이내 눈꺼풀을 살며시 닫아 불의 형상을 그립니다.

자.

마음의 준비를 하고 검은색 문을 열어요. 사방에서 유혹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의 물음에 답을 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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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무슨잠

정신 차리고 보니 졸고 있네요. 이불 귀신이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일어난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벌써 포근한 이불 속으로 포옥 안기고 싶어요. 꿈인지 현실인지, 잘은 모르지만 렘수면이 이런 건가요. 귓가의 소리는 먹먹하게 들리네요.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애매함의 경계에서 멍하니 머물러요. 명상하겠다며 졸고만 있는 사람이 있다고요? 네 그게 바로 접니다. 허리를 곧게 폈지만, 고개는 바이킹을 타고 있습니다. 시간만 축이는 걸까요. 이럴 바에는 잠이나 잘 걸 그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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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춰요 댄스 파티

성냥으로 빚어낸 뜨거운 빛을 촛대에 올렸어요. 심지에 불이 붙자, 작은 화력이 또렷하고 당당하게 피어올라요. 라이터와는 또 다르네요. 생일 케이크 위의 초와 같은 형상이지만, 긴 촛대 위에서 오래오래 광이 날 거예요. 빠르게 소원을 빌지 않고 찬찬히 불을 바라보아요. 고요한 불을 둘러싼 은은한 생명의 결이 참 좋아요.

방 안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이 불덩이는 작은 바람에도 춤을 춰요. 휘청휘청 스텝을 밟는 모습이 왈츠 같기도 하네요. 무슨 일이 있는지 갑작스레 활활 불탑니다. 파트너가 바뀐 걸까요. 그림자도 이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해요. 미소를 지었던 얼굴에 카리스마가 보이기도 합니다. 그늘지게 드리운 자리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아 시선을 다시 어둠 속으로 옮겼어요.


_

꾸르륵

명상을 하면 들린다는 내면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꼬르륵도 아닌 꾸르륵. 소리와 함께 공복 상태라는 것을 인지했어요. 아, 어제 저녁을 일찍 먹었네요. 배고픔을 외면하지 못하고 냉장고 속의 재료가 물 흐르듯 떠올라요. 두부면, 계란, 그리고 먹다 남은 마라샹궈. 자극의 맛을 한껏 느끼고 싶은 날이니 마라샹궈 당첨입니다. 입 안 작은 주머니에 침이 맺히네요. 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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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미루미루귀신

미루고 미루던 미루귀신이 찾아왔어요. 싱크대 위에 그릇들이 목욕을 기다리고, 바닥에 뒹굴 거리는 머리카락이 생각나 눈을 더 질끈 감았어요. 생각해보니 지난주 지지난 주 아니 여름의 끝자락부터 미루던 저도 모르는 투두리스트가 수북하네요. 써야 할 글도 있지만, 좀처럼 써지지 않아 괴로워요. 잘 해내고 싶을수록 시작이 어렵고요. 어쩌면 다자이 오사무는 누구보다도 삶을 잘 살아내고 싶은 사람이었을 거라는 말이 떠올라요. 망하기 직전까지만 미루다가 그때서야 하겠다는 말을 이렇게 뱅글뱅글 돌려서 썼네요. 사실 지금 이 글 마감도 그렇고요. 지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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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벼락

이쯤 되니 두 다리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하체에만 벼락을 맞았는지 저릿저릿하고 발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가 없어요. 다리의 고통이 느껴지자 잡생각의 귀신들이 모두 달아났어요. 제 안의 잡귀신들이 육체의 통증을 견디지 못했네요. 후후. 왠지 승자는 제가 된 것만 같군요. 내일 다시 친목을 다지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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