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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 Oct 11. 2021

바람에 떨어진 열매를 주우러 다닌다

탐스럽게 맺힌 열매를 손에 쥐었더니 뭉개진 껍질만이 남았다.

새콤한 과육의 맛을 느낄 틈도 없이 짙은 공허함이 입안에 가득하다. 헛헛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새 또 다른 열매를 찾아 서성인다. 도무지 안주를 모르는 성정을 지녔다.


‘모 학교의 대학생’  ‘어느 회사의 누구’  ‘여자친구와 남자친구’ ‘누구의 아들과 딸’ 이런 말들은 묘한 안정감을 줌과 동시에 나를 외롭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것이 역할 놀이와 다르지 않다는 덧없음을 지울 수 없다. 허물을 벗으면 무엇이 남는가. 한 편의 긴 연극일 수도 있겠다고 종종 생각한다. 꼭두각시처럼 묵묵하게 역할을 행하는 것은 자신 있어 연출가보다는 연기자가 내 자리겠다.


그렇담 나는 내공이 적은 배우일 테다. 극 중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여 홀로 겉도는 그런 사람. ‘사실은 전부 다 연극이고 우리가 속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없어 홀로 끙끙 앓는 주인공의 친구 정도랄까. 이런 이에게는 전지전능한 연출가가 귀띔이라도 해주었으면 하다. 대본이라도 훔쳐 이름 석 자 옆의 대사들을 곁눈질로 보고 싶다. 극의 결말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극장을 빠져나가는 해피엔딩인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매를 적시는 새드엔딩인지, 혹은 끈적끈적한 찝찝함이 발걸음에 달랑이는 그런 엔딩인지 궁금증을 짓누를 수가 없다. 그럭저럭 봐줄 만한 연극 속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어느새 막이 내린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소망하던 대로 남들과 엇비슷한 대본을 드디어 손에 거머쥐었다. 적힌 대로 아침에는 눈을 뜨고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저무는 해를 바라본다. 훌쩍 여행을 떠나고 만나는 사람을 바꾸는 등 소소한 변화를 줘보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일상의 굴레에 갇혔다. 생각이라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안정이라는 단어와 가까워지면 가까울수록 행복과 슬픔의 단어와 멀어졌다. 마지막으로 펑펑 운 게 언제였더라. 마음에 자리 잡은 풍선이 점점 부풀어 오른다.


이따금씩 매슬로 씨에게 말을 건다. 그는 밥 잘 먹고 건강한지 묻는 하위 단계의 욕구부터 소속감과 자존감을 다루는 상위의 욕구를 하나의 피라미드 형태로 정리한 자다. “매슬로 씨, 저는 무엇이 부족하여 이렇게 텅 빈 어항처럼 허어 한지 모르겠어요.” 소속감을 느끼면 한없이 외로웠고, 사회적 민감성이 낮은 것을 증명이라도 한 듯 존경 욕구는 관심이 없고, 끝도 없는 자아실현 욕구는 말 그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대본을 찢어 종이 파편으로 되돌려 놓았다.


상담 선생님은 나의 타고난 성질 두 가지를 자모로 꺼내 주었다. 호기심과 불안. 불안과 호기심. 함께 붙여 놓은 모습이 어색한 두 단어로만 자기소개를 해도 될 정도로 나는 두 단어로 점철되어 있다. 자극 추구 성향이 높아 새로움을 향한 갈증이 끊이지 않고, 남부럽지 않게 눈에 띄는 위험회피 성향 덕분에 매사 신경 쓸 것이 많고 불안과 함께한다. 전자가 엑셀이라면, 후자는 브레이크인 셈이다. 엑셀과 브레이크를 밟고 밟으며 덜컹덜컹 멀미가 나는 주행을 하는 사람이라 심리적 과부하에 종종 걸린다.


종잇조각이 되어버린 파편을 바라본다. 아침에는 눈을 뜨고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저무는 해를 바라본다. 다만 이제는 연출과 연기를 모두 도맡았다. 정해진 대본이 없어 두렵고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자주 휘청인다. 나무 위의 열매는 높아 바람에 떨어진 열매를 주우러 다닌다. 덜 뭉개진 아이들로 고르고 골라 소중히 소쿠리에 담았다.


불안이라는 열매의 껍질을 벗겨내고 나니

무한의 맛을 내는 과육이 탐스럽게 맺혀 있다.

대본을 을수록 가능성의 최대 크기가 커져만 간다.


불안의 동의어는 희망.

불안의 동의어는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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