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사람들이 왜 살아가는지가 궁금했다. 지나가는 사람을 난데없이 붙잡고 구체적으로 막 물어보고 싶었던 적이 있다. 미치광이처럼 이 사람 저 사람. 왜 사나요. 사는 것이 재미있나요. 아니 누구 때문에 누구를 사랑해서 살아가는 거 그거 말고요. 그런 관계들에서 찾는 의미 말고요. 재미있을 필요가 없다고요. 헛소리하지 말아요. 정말 정말 실례지만 혹시 그냥 살아있기에 살아가나요. 그렇다면 죽는 날을 받아놓고 하루를 꾸역꾸역 알차게 채워나가는 영화 속 주인공과 어찌 다른가요. 유한하다면 더 의미가 있겠지요. 아니면 결국 서로에게 용기가 되어주고 사랑을 주고받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닐까요. 제 희망일 뿐이라고요?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찾아서 결국은 사랑으로 돌아오면 좋겠어요.
삶의 동력은 누군가를 더 부지런하게 만들고, 더 자주 웃고 우는 얼굴을 만드는 듯했다. 어릴 적 교실에는 의미가 없는 아이가 없었다. 저는 세계여행이 하고 싶어요. 화가가 될 거예요. 지구 곳곳을 다니며 본 아름다운 풍경들을 손으로 옮겨 그릴 거예요. 언젠가 자유로이 탐험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상상은 아이의 손에 크레파스를, 붓을 들게 하고 새하얀 도화지 앞에서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줬을 것이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나는 그렇게 되기 위하여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감각을 참 좋아한다. 그 대상을 사랑하여 열정으로 내면을 태우는 뜨거움은 사람을 살아있게 만든다. 사랑하기에 살아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한다. 그것은 친구에게 먼저 사과를 건네는 일이기도, 공연 준비를 위해 혼자 방 안에서 관객을 상상하며 연습하는 일이기도, 그리고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 앞에서 끙끙 거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누구에게든 뚜렷한 목표가 사라지는 시점이 온다. 그냥 누가 좀 대신 살아줬으면 좋겠다는 등 권태로움이 휘감는 때가 있다. 선택의 자유가 선사하는 무한의 가능성에 취한 것도 잠시, 깨지고 싶지 않아 계속해서 흔들리다가 그냥 확 깨져버렸으면 하는 상태에 이른다. 이런 시점에는 누군가가 말해 주었으면 하다. 내 삶의 동력은 이것이라고, 나는 살아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고.
간과하고 있었다. 살면서 만난 모든 이들도 이게 처음이라는 것을. 수많은 갈레의 길 앞에서 단 하나의 길을 골랐다는 사실을. 어쩌면 의미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지런히 나를 알아가고 온 감각에 신경을 기울이는 일. 그리고 그 데이터를 근거로 좋아하는 것들을 선택하여 책임지는 것. 내가 주체적으로 난잡함 속에서 정돈하는 과정. 흔들리고 만족하다가 다시 좌절하고 배워가고. 그리고 사랑하고. 이러한 것들을 알아가는 게 아닐까.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재미로. 그래야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니까. 그리고 각자 이겨내려고 사투를 벌이는 서로에게 사랑과 용기를 주고받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