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동에 8평짜리 자취방에는 월수금 요가 수련생이 산다. 그게 바로 나다. 고요 요가원과 방구석 요가원을 거쳐 지금은 팔 개월째 서촌의 작은 요가원에 다니고 있다. 옆 사람의 동작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따라 하기에 바쁘던 내가 요가를 배운지 석 달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나는 그제서야 주문 같은 요가 동작의 이름을 알아듣게 되었다.
주문을 알아듣게 된 기쁨도 잠시, 근엄한 목소리가 들린다. “살람바 시르사아사나, 머리 서기.” ‘살람-’을 듣자마자 나는 도망을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곧바로 체념한 듯,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다. 정수리를 바닥에 댄 다운독 자세에서 두 다리는 머리 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숙련자들의 발은 바닥을 떠나 구십 도를 거쳐 백팔십 도로 바닥과 수직이 된다. 그들의 다리가 하늘을 향해 쭉 뻗을 때, 내 다리는 도무지 중력을 거스르지 못했다. 마음은 앞섰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배는 있지만 나에게 코어란 없고, 몸통을 거꾸로 들기에 두 팔은 너무 말랑하다며 핑계를 찾곤 했다.
내 발은 풀칠이라도 한 듯 매트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사뿐히 발끝을 올리면 그만인데, 바닥에서 발을 떼는 것이 그렇게 공포스러웠다. 어떻게 머리로만 서라는 것인가. 자고로 인간은 직립 보행을 하며 진화했는데 말이다. 직립 보행을 충실히 이행하는 나는 두 발을 바닥에서 살짝만 떼어도 균형을 잃어 바로 꼬꾸라졌다. 마치 2초 뒤에 넘어질 것을 예상한 사람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머리서기, 그거 못 하면 좀 어떠냐고 나를 다독였다. 요가 달인은 아니지만 정신 승리의 달인이다.
못해도 괜찮다는 말로 버티기에 나의 요가 선생님 춘 샘은 빨간 모자 박 조교로 유명하다. 5분, 10분, 15분. 갈수록 머리로 서는 시간이 길어진다. 머리서기를 터득한 자들에게 이 시간은 두 팔과 정수리로 서 있는 고요한 거꾸로의 명상 시간이다. 홀로 역행하며 조상들의 직립 보행을 충실히 따르는 나는 조금 외로웠다. 나도 남들처럼 세상을 거꾸로 보고 싶었다.
여느 날처럼 머리서기 시간은 오고야 말았다. 두려움에 휩싸인 나에게 춘 샘이 말했다. “지금 안 되는 게 몸 때문인지, 마음 때문인지 알아차리세요.” 머리서기를 못하는 것은 알았지만, 몸이 하는 거 따로 마음이 하는 거 따로라니.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몸인데 마음이 막고 있는 거라면 이 얼마나 아쉬운 일인가. 육체와 마음, 이 둘을 분리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머리서기 못하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코어가 없어서, 팔 힘이 부족해서 머리서기를 못한다고 했지만, 사실 가장 큰 문제는 마음이었다. 못한다고 생각해버리니, 할 수 있는데도 할 수 없었다.
이후로 나는 마음에 주문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세상을 거꾸로 볼 수 있다. 나는 다리를 하늘로 뻗을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니 두려움이 떨쳐지고 드디어 몸이 말을 들었다. 좀처럼 매트와의 이별을 거부하던 두 다리가 이제 천장을 향해 쭉 뻗는다. 어..어…? 게다가 안 넘어진다! 머리서기를 위해 엄청난 방법과 힘이 필요할 줄 알았는데, 너무나 단순하고 쉽게 머리로 서는 사람이 되었다. 심지어 몸이 가볍다고 느껴진다.
“살람바 시르사아사나, 머리 서기.” 나는 이제 이 시간을 기다린다. 마음에 주문을 걸고 자연스럽게 두 다리를 올린다. 거꾸로 세상을 바라보며 복잡한 머릿속을 게워내는 여유도 생겼다. 나는 이제 내 마음에 주문을 거는 사람이다. 적어도 두려운 마음 때문에 나의 한계를 정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