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만화 번역 3

장기 연재의 마침표만을 남겨 두고

by 정시체

우여곡절 끝에 골프 만화 세 권을 납품하고 조금 시간이 지나, 같은 만화 번역 회사에서 또 다른 의뢰가 들어왔다. 장르로 따지면 메디컬 로맨스라고 할까, 간호사가 병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한편으로 연애에도 열심인 만화였다.


꽤 장편으로 스무 권에 달했고, 나는 다른 번역가의 대타로 7권부터 투입된 상황이었다. 앞 권이 제공되었는데, 찬찬히 읽으면서 인물들의 감정선을 더듬고 캐릭터 분석표를 만들 여유가 없었다. 사나흘 동안 만화책 한 권을 번역하고, 매 쪽에 포토샵으로 글자까지 얹어 납품하던 때였다. 주인공이 어떤 우여곡절을 거쳐 현재 어떤 상황에 처했으며 주변 인물들과 어떤 관계인지 대충 한번 훑기만 하고 번역하려니 인과 관계 파악이 잘 안 되고 몰입도가 떨어졌다.


작품 속에 일본의 종합병원 시스템과 간호사 생활이 그려져 있었다. 직장에 제대로 다녀 본 적이 없고 관심도 별로 없어서 근무 형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종합병원 간호사가 3교대로 일한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근무 시간대에 따라 데이, 이브닝, 나이트라고 했는데, 오전·오후·밤 근무로 번역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학교에서 가능한 한 외래어를 우리말로 순화하는 게 좋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뒤늦게 후회했다. 알고 보니 현직 간호사들은 외래어를 그대로 쓸 때가 많았다. 외래어로 처리된 부분에서는 그냥 외래어를 살렸다면 훨씬 현장감이 살았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한국과 일본은 시간 개념이 묘하게 달라서 번역하기가 까다롭다. 일대일로 대응하는 용어가 있긴 한데 의미하는 시간대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저녁녘(夕方)은 오후 15시부터 18시까지로, 한국인이 흔히 떠올리는 시간대보다 훨씬 일찍부터 시작된다. 새벽도 시간대별로 표현이 더 세분화되어 있어 미명(未明)은 0시부터 3시까지, 새벽녘(明け方)은 3시부터 6시까지다. 추리 장르일 경우 시간이 중요하므로 시간대를 나타내는 단어를 번역할 때 신경을 써야 한다.


배경이 병원인 만큼 처음에는 의료 현장에서 쓰이는 생소한 용어가 느닷없이 툭툭 튀어나와 바짝 긴장을 했다. 하지만 이미 나왔던 용어만 계속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 평정을 되찾았다. 간호사들의 꿈과 사랑,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다양한 입원 환자 사이의 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머리보다는 마음으로 번역했다.

다행스럽게도 병원 안은 모두가 정숙을 유지하고 있어서 발생하는 의성어·의태어가 한정적이었다. 나오는 의성어는 병실 문을 여닫을 때의 ‘철커덕’, 의료 도구를 내려놓을 때의 ‘달그락’ 정도밖에 없었고, 의태어도 기껏해야 복도를 걸을 때의 ‘살그머니’, 급한 환자가 발생했을 때의 ‘허둥지둥’뿐이었다. 이제는 감이 생겨서 대체로 척하면 척이지만, 아직도 의성어·의태어가 많이 나오는 만화는 재앙이라고 생각한다. 목 넘김이 나쁜 음료를 억지로 들이켜는 느낌이다. 특히 전면에 흩뿌려진 십수개, 수십개의 신음과 괴성을 여러 쪽에 걸쳐 맞닥뜨릴 때면 제대로 된 인간의 언어로 똑바로 말하라고 소리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친다.


나는 20권까지만 받았기 때문에 총 스무 권인 줄 알았는데, 막상 번역을 해 보니 내용이 도중에 뚝 끊겨 있었다. 아마 주인공이 미국 간호사가 되기 위해 유학을 앞둔 상황에서, 환자였던 애인과는 결국 사별하는 장면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다음 내용이 너무도 궁금해지는 지점에서 애매하게 끝났기 때문에, 마지막 권까지 무사히 번역을 마친 데 대한 홀가분함보다는 아쉬움과 의아함이 앞섰다. 일본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역시 속편이 있었다. 하지만 그에 얽힌 다소 충격적인 소식도 함께 알게 되었다.


그 만화는 1991년부터 2001년까지 한 만화 잡지에 연재되던 것을 단행본으로 묶은 작품이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는 원제에 ‘신’ 자가 붙은 채 속편이 연재되었는데, 작가가 갑자기 큰 병에 걸려 연재가 중단되고 말았다. 연재가 재개된 시점은 2010년. 십 년에 가까운 투병 생활 끝에 수술을 받은 후였다. 기존 연재분에 2010년부터 2011년까지의 분량을 더한 것이 2011년, 한 권의 두툼한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비로소 완결이 났다.


연재가 중단된 십 년 동안 일본 의료 현장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고 한다. 일단 간호사의 호칭이 ‘간호부’에서 현재의 ‘간호사’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수간호사의 직함도 바뀌었으며, 간호사 특유의 캡 모자가 사라졌다. 완결편에서는 바뀐 현장의 풍경이 그려졌다. 처음으로 남성 간호사도 등장한다.


사실 나는 완결편을 읽지 않았다. 이 만화는 내 안에서는 아직 미완결로 남아 있다. 끝을 내기 아쉬워서 차마 보지 못했다. 가끔 내가 번역한 작품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현실의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오랜 친구처럼 문득문득 소식이 궁금해진다. 완전히 허구의 인물인 걸 알지만, 미완인 채 두면 적어도 내 마음속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일본 만화 중에는 유독 십 년, 이십 년에 걸친 장편 연재작이 많다. 이것은 독자의 어느 한 시절, 또는 무려 두 시절에 이르는 기간이다. 그래서 어떤 작품은 고스란히 누군가의 어느 시절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영원히 마음에 새겨진다. 긴긴 세월 붓을 놓지 않고 장편을 그려낸 작가들을 존경한다. 이 작품의 작가도 긴 투병 생활을 극복하고 결국 작품을 마무리했다. 지금은 건강을 회복하고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모양이라 마음이 놓인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아닌데도, 아직까지 주책맞게 혼자 내적 친밀감에 휩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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