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번역
대학원 2학년 때 시작한 만화 번역은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약 1년 동안은 이어졌다. 당시 물가를 감안하더라도 번역 단가가 정말 낮았지만, 정기적으로 일감을 주니 좋았다. 대표의 매너도 좋았고, 일 처리도 아주 깔끔했다. 장점이 없지 않았고 노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아마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좀 더 오래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별다른 일이 생겨 버렸다.
간호사 만화를 번역한 후로 더 많은 일감이 주기적으로 들어왔다. 한 작품을 번역하면 바로 다음 작품이 배정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여러 작품이 들어 있는 폴더 하나를 통째로 전달받았다. 엑셀에 정리된 작품별 마감 일정에 따라 정해진 순서대로 착착 번역해 나갔다.
당시 폴더 안에 있던 작품은 전부 19금 성인 만화였는데 놀라울 정도로 수위가 높았다. 전자책으로 편집되어 인터넷상의 여러 만화 플랫폼에 제공되는 듯했는데, 초고수위 성인 만화에 대한 수요가 상당한 듯했다. 이해는 잘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묘사뿐만 아니라 내용과 설정이 하나같이 처참했기 때문이다. 아니, 내용이랄 것이 딱히 없었다. 그곳은 그저 짐승의 세계였다. 보이는 것은 뒤얽힌 맨몸뚱이요, 들리는 것은 난무하는 신음소리였다. 첫 장에서 만난 두 사람(때때로 여러 사람)이 바로 다음 장에서 몸을 섞을 정도였다. 이걸 돈 주고 본다고? 머릿속의 물음표를 지울 수가 없었다.
원래 장르를 가리지 않고 웬만한 이야기는 다 좋아하는 편이다. 성인 타깃의 콘텐츠에도 별로 편견이나 거부감이 없다. 하지만 결코 즐기는 건 아니다. 웬만하면 모두가 제대로 옷을 걸치고 나와서 이야기를 발전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작품이 더 좋다. 작품으로 승화되지 못한 일그러진 판타지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동안 나는 지치고 말았다.
종종 아슬아슬하게 범죄의 영역에 걸쳐 있는 작품도 있었다. 강간, 성착취, 청소년 대상 그루밍… 이것은 표현의 자유나 취향의 문제를 한참 벗어난 영역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과거에는 비윤리적이고 반인권적인 콘텐츠가 거의 아무런 규제나 지탄도 받지 않고 고스란히 유통되고 노출되었다. 그래서 종종 이런 유의 작품을 맞닥뜨렸다. 최소한의 조치로 등장인물이 미성년자면 나이를 올려 번역한다는 방침은 있었지만, 성인의 연령이라고 해서 무슨 짓을 당하든 괜찮은 건 아니다.
솔직히 나는 그다지 올바른 사람은 아니다. 번역을 하면서 일일이 작품의 도덕성을 따지고 싶지 않다. 어차피 일을 가려 받을 처지도 아니다. 내용이 어떻든 나와는 상관없고 그저 번역료만 받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 올바르지 않은 내용인지는 알았다. 그 정도 판단력은 있었다. 그런 내용의 작품은 나를 조금씩 좀먹어 들어갔다. 아무리 지침에 따라 번역 단계에서 설정을 바꾼다 해도, 원래 어떤 설정이었는지 번역가인 나만큼은 빤히 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격을 입었다.
애써 흐린 눈을 한 채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하고 알맞은 단어로 바꿔 나갔다. 그러면서 마음이 점점 병들어 갔다. 번역을 마치고 납품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국어 버전으로 읽을 때면, 이 말을 내가 다 썼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다시금 현타가 왔다. 생계를 위해 억지로 에로 연기에 뛰어든 성인물 배우가 된 심정이었다. 하기 싫은 연기를 실감 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 곤란한 지점이었다. 에로 장면의 다채로운 모양과 소리를 다채롭게 표현하려고 애를 쓰면서,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시간에 번역을 했다. 밤낮으로 초고수위 성인 만화를 번역하다 보니 정신이 피폐해졌다. 하지만 일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일감을 받은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마감일까지 납품해야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대충 씻고 밥을 먹은 뒤 바로 번역에 들어갔다. 그리고 자정 직전에야 번역을 마치고 잠자리에 드는 날이 계속 계속 이어졌다. 하루 일과 도중에 힘들어할 틈은 없었다. 속으로 ‘나는 아무 감정도 없는 번역 기계다’라고 되뇌었다. 대신 매일 밤 자기 전 한 시간 동안만큼은 하루의 모든 고통을 한꺼번에 몰아 느끼며 엉엉 울었다. 그 시간이 내가 나 자신에게 허락한 유일한 인간으로서의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번역가로 일하는 동안 의뢰받은 작품을 되돌려 보낸 적이 딱 두 번 있다. 그중 한 번이 이때다. ‘성인 만화 모음집’ 안의 작품을 거의 다 번역하고 마지막 한 작품만을 남겨 둔 시점이었다. 정말이지 때려죽인다 해도 더는 번역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하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 길로 그 만화 번역 업체와는 완전히 인연이 끊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