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인 일은 거대한 결심으로부터 혹은 엄청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아주 작은 시도가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쭈뼛쭈뼛 달린 그날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나운서 지망생이던 나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화면에 예쁘게 나오기 위해서 다이어트를 해야만 했다. 스터디 원들이 그랬고, 아카데미 친구들도 모두 마른 몸을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매일 네 시간씩 걷고 먹는 음식을 절제하고 정신이 몽롱했지만 원고 연습, 입 꼬리기 올리기, 발음 교정 등 자신만의 엄격한 감독관이 되어 단점만을 찾아 고쳐야 했다. 점점 지쳐 갔고 잠깐만 방심하면 감기와 몸살, 임파선염처럼 면역력이 떨어지면 나타나는 증상들 때문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조급증과 불안감이 나를 갉아먹었고 나중엔 울면서 걷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란 질문을 반복하면서...
마지막 카메라 테스트를 보고 오던 날, 아주 담담하게 이젠 그만해야겠다고 일기장에 적었다.
의미도 열정도 손끝 힘까지 모두 빠져나가 더 이상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공허함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를 보냈다. 그땐 뭐라도 해야만 했다.
당장 큰 변화를 원한 게 아니라 작지만 매달릴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동네 산책을 하고 모교 앞을 지나가는데 웃고 소리 지르며 달리는 후배들이 보였다.
고등학교 때 석식을 먹고 소화시키기 위해 친구들과 운동장을 몇 바퀴씩 달리던 내가 떠올랐다.
큰 고민 없이 웃고 뛰어다니던 그때가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한 번 달려볼까?’ 집에 있던 운동화를 신고 산책로로 나갔다. 달리긴 해야겠는데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달리는 폼이 이상하다고 사람들이 비웃지 않을까?’
사람들은 각자 운동하느라 나를 쳐다보지 않았을 텐데 뭔가 처음 달린 날은 모두 나만 쳐다보고 있다는 착각에 힘들었다. 창피했다. 잠깐 달리다가 앞에 누군가가 오는 것 같으면 태연하게 걷고 또 혼자 남겨지면 달리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1분 뛰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다니! 걷고 뛰며 중간에 휴식이 있었음에도 거친 숨소리와 쿵쿵 거리는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렸다. 온몸은 비를 맞은 것처럼 흠뻑 젖은 채 양쪽 무릎을 잡고 숨을 헐떡였다.
첫째 날 훈련이 끝났다는 어플 알림을 듣는데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흐르는 땀이 보이니 엄청난 일을 해낸 것 같은 뿌듯함과 하찮은 내 체력이 웃기면서 슬펐기 때문이다.
2025년 만 5년 차 러너가 됐다. 인생이 극적으로 바뀐 건 아니다.
그러나 달리기 전과 후의 나는 많이 다르다. 기댈 곳이 생겼고 늦더라도 한 발자국씩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울한 날도 누군가가 미운 날도 달리고 나면 별 거 아닌 일이 된다. SNS로 소통하는 러너 분들과 소식과 안부를 주고받는다. 얼굴을 보며 달리는 건 아니지만 같이 달리고 있다는 느낌 덕분에 든든하다.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아도 자꾸 내 주변을 맴도는 것들이 있다.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리며 동경만 하거나 준비만 하거나. 달리기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직접 하지는 않으면서 계속 맴돌기만 하는 무언가.
처음 산책로를 달리던 날 년 동안 달리기를 하는 나는 없었다.
그냥 하자. 무료한 일상과 새로운 선택 앞에서 망설이고 있다면 그냥 해보자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에게 말해본다. 아! 물론 아직도 나에게 더 필요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