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게' 살겠다.
참다참다 못해 선배에게 카톡을 보냈다. "선배 저 이러려고 기자된게 아닌데 현타와요"라고.
외곽에 있어 중심까지 들리지 않은 이들의 목소리를 담는 사람이 되고자 언론고시반에 들어갔다. 세상에 정보는 많고, 기업들이 내보낸 정보는 더 많은 현실이다. 그래도 적어도 내가 온 곳은 다를 줄 알았다. 사회의 약자를 대변해야한다는 당위성이 있는 곳이었으니. 하지만 오히려 그 어느 곳보다도 더욱더 임금노동자 논리가 가득한 회사였다. 아니 우리가 이러자고 그 긴긴 밤 목소리를 높이며 광화문 사거리에 있는 레거시들을 비판했던가
적어도 쓸 수 있는 기사는 쓰고, 같은 기사라도 조금 더 고민을 해야하지 않나. 그러라고 있는 회의가 아닌가. 이상한 곳에서만 나를 존중해준다. 결과를 가지고 가면 그제야 첨삭을 할 뿐이다. 과정을 함께 고민해주지 않는다. 일을 하고 싶다. 정말 의미있는 일을. 임금을 벌기 위한 일이라면 진작에 다른 일을 했을꺼다.
적어도 나혼자 잘먹고 잘사는 이기주의에 빠진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애당초 불공평하게 시작된 인생임을 인정하고 서로 돕고 사는 삶을 꿈꾼다. 결국 나는 너가 되고 너는 내가 되도록 구성된 세계아닌가. 어제 다른 사람이 당한 사기와 억울함 폭력성을 그대로 방치해두면 결국 이것들은 언젠가 내 안면을 강타할 수 밖에 없는게 세상이다. 지금까지 모든 일이 그래왔다.
여성에 대한 인권무시를 방치해둔 결과 우리 어머니들의 신체와 마음은 망가졌다. 또 오늘날 '야동'이라고 불리는 불법촬영이 판치는 세상을 만들어 공공화장실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혼인율도 떨어졌으며 그에 따라 합계출산율도 감소해 인구는 곧 소멸할 빅피쳐를 그리고 있다. 이분법사고로 동물과 인간을 나누고, 인간을 동물 위에 놓은 결과 인수바이러스에서 시작된 병이 전세계 경제를 무너트리고 있다. 싼값에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플라스틱을 생산해내 써버린 결과 미세플라스틱들이 바다로 들어가고 우리가 그 물과 그곳에서 자란 해양생물들, 그리고 그 물을 먹고 자란 식물을 먹고 살게됐다. 비정규직 문제와 기업의 이익을 위한 규제완화를 방치한 결과, 학생들이 가득한 배를 두고 선원들은 도망쳤으며 철근을 과다 적중한 폐기됐어야할 낡은 배는 가라앉았다. 지구는 점점 더 더워지고 기후영향을 직격으로 받는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최근에는 사과가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
도대체가 왜 이지경까지 왔나 궁금했는데 안락한 '언론'사를 다녀보니 알겠다. 안락함이 문제다. 즉 '그러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문제였던 것이다. 안락함은 독이다. 정서적으로 '가난'해야한다. 그런데 정서가 가난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가난은 면했다는 전제하에 물리적으로도 어느정도 가난해야 하는가보다.
이곳은 정말 아니다. 누구의 목소리를 담을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담을 것인지, 언제 담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일절 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 내야하는 내 업무를 위해 어떤게 그나마 더 있어보이는지의 기준으로 발제를 하고 기사를 쓴다. 먹을 싼 종이는 먹향이 난다하지 않았나. 내 몸에서 슬슬 생선 비린내가 나고 있는 것같다. 이곳에 존재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겠다. 여기에 있기에 내 인생은 너무 소중하다.
보장된 정년, 평균이상의 월급, 각종 복지혜택이 있는 회사를 경험해봤다는것 자체는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이 경험을 통해 나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배울 수 있는 곳' '더 깊은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곳' '남을 도울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