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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지 Mar 29. 2021

삼시세끼

투정 없는 삶.

"친구야 나 전주왔다!" 

오랜만에 찾은 전주, 역에 도착하자마자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그리운 단어 '친구' 

내게는 오랫동안 이름보다 친구로 불리는 이가 하나 있다. '이경찬'


여러번의 전학생활 끝에 전주에 정착을 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무렵이다. 정확하게는 5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전학을 가게 되었다. 

"너 여그자 아냐?". 

'여그자?' 이게 무슨 말일까'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낯선 단어와 말투가 뒤섞인 전북 사투리로 질문이 이어진다. 낯설고 두려웠다.

그 때  "야 여그자 우리집 앞에 살자너" 안경을 끼고 키가 껑충한 한 친구가 먼저 아는 척을 한다.

'여그자, 표준어로 '얘' 정도 되는 단어구나' 

 

오랜 전학생활을 하며 배운 것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 착한 척, 순진한 척 하는 순간 먹이가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남학생 사회가 그랬다.

물론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하면 이를 증명하는 순간 모든 것이 해결되지만, 당시 나는 왜소했고, 운동과 공부는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아는 척 해주는 친구가 있으면 일은 쉽게 풀린다. 그렇게 경찬이 덕분에 나는 어렵지 않게 낯선 친구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준호야, Nothing gona stop us now 녹음했다!" 

같은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 더더욱 친하게 지내던 경찬이는 당시 내게 상사병을 앓게 만들었던 '크리스티스완슨(Kristy Swanson)'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마네킨2'의 OST 녹음을 위해 인기 라디오방송이었던 '오성식의 굿모닝팝스'에 열심히 사연을 보내고 있었다. 내 상사병이 그만큼 깊었고, 친구의 상사병에 신경이 많이 쓰였나보다.

지금도 그날 받아 들었던 녹음 테이프를 잊지 못한다. 

"전주에 사는 이경찬군이 친구 한준호군을 위해 신청해주셨네요. 마네킨 2의 주제곡 낫싱고나스탑어스나우. 지금 듣고 계시죠?"


서로의 엇갈린 삶. 우리 둘은 서로를 보며 삶이 엇갈렸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수학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내 친구, 집에 폐 끼치지 않기위해 경찰이나 군인이 되려고 했던 나.

물론 둘 다 수학과로 진학을 했지만, 경찬이는 집안 환경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경찰시험 준비 끝에 내가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친구집, 고시원, 하숙집, 친척집 그러다 또다시 혼자사는 친구가 보이면 3개월이고 4개월이고 빌붙어 살던 대학시절, 경찬이에게도 빌붙게 되었다.


성수동, 중랑천 근처의 낡은 다세대 주택.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만 보일 정도로 작게 뚫린 창, 눅눅한 이불, 습한 냄새 그리고 수도의 녹물.

한겨울에 보일러를 돌릴 형편이 안되다보니 있는 옷들을 껴입고 자게 한 것을 지금도 미안해하지만, 그렇게라도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고, 내 친구는 내게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찬아, 혹시 2천 원 있냐?"

친구가 비번이었던 날, 함께 성수역으로 걸어가는 내내 머릿 속은 복잡했다.

생활비와 학비를 과외와 아르바이트로 채우고 있었는데, 받기로 한 날짜에 과외비를 받지 못하면서 생활비가 동이 난 것이다. 생활비라고 해야 지하철 회수권비용과 교내 식당 식권을 살 돈 그리고 학비를 위해 저축을 하면 신기하게 남는 돈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20대의 내 생활이 너무 궁상맞았다. 


"야 너는 차비도 없이 어떻게 사냐? 밥은 먹고 다니냐?"

왜 내가 돈없는 것에 자기가 화를 내는지. 

녀석은 갑자기 츄리닝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세번접힌 만 원짜리를 꺼내 손에 쥐어준다.

"밥 도 좀 사먹어" 그리곤 뒤돌아 사라져버렸다.


"어이 거기가는 학생, 학생!"

학교를 마치고 성수역에 도착해 집으로 가던 길,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경찰차 확성기를 통해 나온다. 경찬이였다.

"준호야 밥먹으로 가는데 같이 가자" 아침 일로 이녀석도 마음이 쓰였는지 대뜸 싫다는 손을 붙잡고 인근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아줌마 삼겹살 5인 분 주세요"

얇게 썬 냉동 삼겹살, 불판에 굽는 고기를 얼마만에 먹어보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지성아~ 나중에 커서 너랑 똑같이 생긴 아이 낳아라. 아빠가 잘 키워줄게."

아이가 "네"라고 대답하며 활짝 웃는다. 행복하다.


모처럼 일찍 일을 마치고, 아이가 농구를 하는 곳을 찾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밝고 즐거워 보였다. 그렇다고 나와 내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비교하며 내 어린 시절이 마냥 힘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게도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셨던 부모님이 계셨고, 그 분들도 내게 형편내에서 최선을 다해주신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고 나오는 아이에게 오랜만에 저녁을 차려주었다.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동생들과 하던 맛있는 반찬 경쟁도 없고, 밥을 더달라는 부탁도 없다.

아이의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막내 나이의 나를 떠올려보니, 서예가셨던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당시 집에는 늘 손님들로 붐볐었다.

하루면 여러차례 식사를 차려야 했고, 없는 살림에 어머니께서 늘 난감해 하셨던 기억이 있다.

형편이 그렇다보니 찬 역시 다양하진 않았다. 대부분 나물과 여러 김치종류였고, 일제시절 잠시 일본에서 이스트 포대자루를 자전거로 나르며 공부를 하셨던 할아버지 영향으로 '나나스케'라 불리는 울외 장아찌가 자주 상에 올랐다. 진 밥을 좋아하시던 할머니와 된 밥을 좋아하시던 할아버지 사이에서 늘 힘들어하셨던 어머니 모습과 그나마 자식들 주려고 준비했던 야심찬 반찬들은 "반찬이 이거밖에 없냐?"는 할아버지 언성에 남겨둘 수가 없었다.

한창 성장기였던 나와 남동생은 집에 오면 늘 밥솥을 열어 밥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집에 들어오며 어머니께 "밥 남았어요?"하고 묻는 습관이 생긴 것도 그런 환경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기억이 슬프진 않다. 당시에는 내가 아는 많은 집들이 그러했으니.


다만, 젊은 날의 나를 돌아보니 내 삶은 '삼시세끼'와의 전쟁이었던 것 같다.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호주머니 안의 돈을 헤아려보고, 어느정도 규모로 먹을지를 고민했다.

그때는 이렇게 아이의 평온함과 웃음으로 배가부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삼시세끼를 걱정하지 않는 지금의 내 삶이 그래서 감사하고, 나는 그렇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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