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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지 May 11. 2021

할아버지의 아내

반복하기 싫은 경험에 대하여

얼마전 한 친구의 페이스북에 메인 사진이 바뀌었다.

우수에 찬듯한 모습과 함께 올라 온 글을 읽다 문득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어디로 떠나나?'

그리고 얼마뒤

'많이 바쁘지? 건강 잘 챙기며 일해'라며 문자가 하나 왔다. 


몰랐던 사실인데, 그 친구는 식도암을 앓았고, 5년 간의 치유기간을 거쳐 완치판결을 받자마자 전이 소견과 함께 재발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며 내게 응원을 해달란다.

누구보다 마음이 힘들 그 친구에게 과연 어떤 응원을 해줄 수 있을까.

나는 아침마다 생각나면 그에게 문자를 보내곤 한다. 그러면서도 '힘내'라거나 '파이팅'이라거나 '건강해질거야'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다. 

겨우 한마디 건네는 말이 '힘내자',  이 말은 아픈 친구가 아닌 내 스스로 되뇌였던 말은 아니었는지 싶다.


"앞으로 한주 후부터 많이 힘들어진다는데, 미리 겁먹지 않으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밝다. 

아니 '밝은 척 하는 것이겠지'


알면서도, 그럼에도, 나는 오늘조차 '힘내'라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경험] 때문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고향집 할아버지의 서재에 꽂혀있던 책 한권이 기억난다.

당시에는 이름도 낯설었던 '천상병' 시인의 이야기.

그가 생을 마치던 93년 4월은 이등병으로 군생활 중이었다. 뒤늦게 서울생활을 하며, 인사동에 '귀천'이라는 찻집이 있다는 말과 그곳이 고인이 된 천상병 시인의 아내분이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서점에서 그의 시집을 찾아 제대로 읽어보았다. 


친구에게 천 원 한 장 구걸해 맥주 한 잔 마시고,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던 천재시인은 내 인생에서 잊을만하면 읊게되는  '귀천(歸天)'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눈물을 시로 남겨 놓았다. 


장인어른의 모습이 떠오른다.

장인어른의 건장했던 모습은 할리우드 배우 다니엘크레이그를 떠올리게 했었다.

지금도 처음 인사드리러 갔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반대를 무릎쓰고 찾아간 아내의 제주도 집 대문앞에 서계시던 장인어른, 남자가 봐도 범상치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강인했던 인상과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몸. 하지만, 장인 어른께서는 야속하게도 담배와 술을 끊은지 13년 만에 폐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마지막 항암치료를 하시던 모습. 그리고 무기력하게 삶을 놓으시던 모습. 숨을 거두시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친형과도 같았던 회사 선배가 떠올랐다.

아나운서국을 떠나며 발령받았던 부서에서 처음 만나 미디어산업의 미래를 논의한는 핑계로 술도 참 많이 마셨었다.

회사를 나가려고 사표를 쓰겠다며 생떼를 쓰던 날, 조용히 불러 타일렀기에 지금의 내 모습이 있을 것이다.

"너는 내 동생이다"라며 친형제처럼 지내던 형이 어느날 "준호야, 나 췌장암같다는데 의사선생님 좀 찾아줘"라는 전화가 왔다. 명의를 찾아보았고, 수술도 빠르게 진행했었다. 

마취를 깨고 나오던 수술실 방 앞에 서있었고, 가족보다 내 얼굴을 먼저 마주했었다.

"준호야 나 살고싶어" 전신마취약이 남아있어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서도 살고싶다는 의지를 보인다.

하지만 6개월 뒤, 완치될거라 믿었는데, 암은 복막으로 전이되었고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형이 세상을 등지기 하루 전 병원을 들렀다. 

너무 멀리 가버려서 이제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아서 억울하고 슬펐다.


천상병 시인의 시 구절처럼 정말 이 세상 소풍 끝내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은행나뭇잎이 한없이 노랗던 날

내 할아버지는 그의 아내를 떠나보냈다


5형제 중 둘째인 아버지, 

어려서부터 초.중.고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유명 의대로 진학해 안과의사가 된 집안의 자랑인 큰아버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큰아버지와 둘째인 아버지에게는 삼남매가 있었고, 그 중 집안의 첫째와 둘째가 또 공교롭게도 동갑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늘 비교를 당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 우리도 비교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큰 집의 아이들 즉 내 사촌들은 무슨 옷을 입는지, 어떤 음식들을 먹는지, 방에는 침대가 있는지 등.


그런데 이런 어린 아이들의 마음을 더욱 산산히 무너뜨린 분은 다름아닌 할머니였다.

우리는 생일마저 비슷했고, 큰 집의 사촌들 생일이면 지금도 유명한 전주의 풍년제과에 들러 가장 비싼 생크림이나 아이스크림 케잌을 주문했었으며, 나는 할머니를 따라가 주문한 케잌을 들어줘야했고, 함께 큰 집에가서 생일 축하노래를 불러주어야 했다. 비약이겠지만, 생일에 초대받았다기 보다 하인같은 느낌이었달까.

아이들의 마음이 다 그렇듯 나도 똑같이 대우받기를 원했으나 한달 뒤 맞게된 내 생일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동네 빵집에서 사온 버터크림이 듬뿍 발라진 케잌이 있었고, 노래를 불러주는 사촌들은 당연히 없었다.

늘 차별받았다는 생각에 할머니를 좋아해본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다.


시간이 한참 지났다.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들도 낳았으며, 공중파 아나운서로 생활하고 있었다.

억지로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할머지가 계신 요양원을 방문했을 때였다.

낯설고 싫었다. 할머니에게서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래된 치매로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같은 방 할머니들이 간식을 빼앗아 먹을까봐 걱정하는 모습에 더욱 낯설어졌다. 할아버지보다 내겐 더 호랑이같고 무서웠던 사람인데.


11월 11일 빼빼로 데이, 지금도 연도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요양원에서 봤을 때보다 더 마른 손목이 보였고, 그 손목에 묵주팔지가 채워져 있었다.

염을 하는 모습을 유리를 통해 바라보다 내 양 어깨가 들썩거렸다. 좋은 기억도 없는데...

한참을 울다보니 아내가 뒤에 서 있었다. 함께 울고 있었다. 내 할머니와 이야기 한 번 해본 적도 없을텐데. 


주변을 둘러보니 벽쪽 의자에 노인 한 분이 지팡이에 이마를 기댄채 앉아 있다. 나의 할아버지다.

당신에게는 아내의 죽음인 것이었다.

그의 아내는 칠순을 맞기 전 치매가 찾아왔고, 고심끝에 아내를 요양병원에 보낸 채 홀로 살아왔다.

그때 할아버지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시간이 흘러 내 어머니께서 떠나시던 날 아버지를 통해 깨달았다. 

짝을 잃은 슬픔. 미안한 마음.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 그리고 그리움.


화장터로 들어가던 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노란 단풍나무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곳에 서있었는지 나무기둥은 굵었으며, 쏟아져 내릴듯 잎은 풍성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선선한 공기 속에서 두 손에 받아든 할머니의 유골함은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평생 내게 냉정했던 할머니가 작은 유골함에 담겨서야 따뜻함을 남겨주시는구나.


세상에는 반복하기 싫은 경험들이 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경험.

그래서 경험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경험으로 인해 희망조차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복하기 싫은 경험은 부정해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생긴다. 


희망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희망]인 것이다.


내일은 친구에게 '힘내'라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낼 것이다. 너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희망]을 꿈꿀 것이기 때문에, 너의 희망을 함께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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