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을 읽고
눈에 띄는 선명한 색과 예쁜 일러스트, 마법을 닮은 표지의 글씨체, 적당한 두께감, 가볍지만 거칠게 손에 감기는 내지 질감. 이 책의 외형은 얀 마텔이라는 작가의 명성을 차치하고서라도 쉽게 구입하고도 남을 만큼 매력이 넘쳤다. 그러나 1부를 다 읽는 데에만 거의 2주를 소요했고 고작 A4 한 페이지로 책에 대한 소감을 적는데 이틀간 온 정신을 쏟았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생각보다 거대한 산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상실한 이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
3부에 걸쳐 펼쳐진 이야기의 공통점은 주인공의 사랑하는 이들의 상실이다. 토마스는 어린 아들과 아내, 아버지를, 에우제비우는 아내를, 그리고 마리아는 남편과 아들을, 피터는 아내를 잃었다. 떠난 이들은 남겨진 주인공들에게 그들의 존재 자체가 삶의 의미였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었다. 각 챕터에서는 상실을 경험한 주인공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들의 삶을 살아간다.
1부에서 토마스는 분노와 복수를 목표로 살아간다. 신을 향한 그의 분노는 절대로 신과 마주하지 않겠다 내지 신을 우러러보지 않겠다는 의미로 거꾸로 걷는다. 또한 예수상이 아닌 침팬지가 매달린 교회를 찾아 험준하고 처참한 자동차 여행을 한다. 이 여행의 끝에 오랜 세월 신으로 섬겼던 이의 모습이 사람이 아닌 유인원이었다는 사실을 밝혀 신을 욕되게 하려는 것이 목표였다.
다 끝났다. 이 십자가의 예수가 전시되어 널리 알려지면 다른 예수상 모두를 조롱할 것이다. 토마스는 자기 이야기를 속으로 중얼거린다. 보라고. 당신이 내 아들을 데려갔으니 이제 내가 당신 아들을 데려가는 거요. (P.156)
그러나 그의 생각과 달리 이야기를 들은 수녀는 예수님이 유인원이라도 그는 여전히 ‘신의 아들’이라며 대수롭지 않아 한다. 결국 여행의 끝은 복수로 인한 기쁨과 환희가 아닌 허무함과 자동차 사고로 치어 죽인 소년으로 인해 죄책감, 그리고 자기를 떠나버린 아내와 아들, 아버지에 대한 더 커진 그리움이었다. 토마스는 복수의 완벽한 실패를 인정하고 신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2부에서는 사랑하는 이의 상실에 대해 죽었으나 죽지 않은 것, 식어버린 시체가 아닌 과거를 함께 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할 안식처로서 인식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현실과 상상을 오가며 판타지로 이야기에 접근한다. 에우제비우는 언제나 신앙과 이성을 결합한 이론을 펼치기 좋아했던 아내를 사고로 잃게 된다. 아내의 상실을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녀를 다시 소생시킨다. 상상 속에서 그는 아내를 부활시킨다. 아내는 여전히 아가서 크리스티 추리소설 즉, 이성 속에서 신앙의 의미를 찾아 에우제비우에게 이야기해준다.
마리아는 60년의 결혼생활을 함께한 남편 라파엘이 죽자 병리학자에게 부검을 요청하며 묻는다.
그이를 열어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주세요.
그녀의 요청은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지였다. 마리아는 라파엘 시신에 그의 과거와 경험으로 상징되는 그리고 모든 추억의 물건들을 꺼낸 후 몸속에 누워있는 침팬지와 아기 곰 사이에 자리를 잡고 누워 한 몸이 된다. 책 전반에 걸쳐 부활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침팬지는 사고사를 당한 그들의 어린 아들을 상징하고, 아기 곰은 아들이 살아있을 시점 아내로 상징된다. 마리아는 이 둘 사이에 누워 남편의 육체와 모두가 하나가 된다. 마리아는 그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
3부에서 아내를 잃고 깊은 외로움을 겪는 피터는 이 상실감을 대체해줄 대상을 찾아 평온을 되찾아 간다. 사회적인 지위와 부를 내려놓고 오도(침팬지)와 함께 포르투갈 외딴곳에서 생활하면서 피터는 사람의 관점보다는 오도의 관점으로 일상을 지낸다. 오도와 매일 숲을 산책하고 눈빛과 몸짓으로 대화하며 때로는 카페에서 함께 커피를 마신다. 유인원이지만 오도는 그 누구보다 피터의 삶을 단단하게 채워주고 아내를 자리를 대신하여 행복을 준다.
작가는 각 챕터에서 이야기한 상실을 대하는 자세 중에 어떤 것이 올바른 것인지 결론 내지는 않았다. 1부 토마스의 처절한 자동차 여행을 통해 복수를 하려는 그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옳지 않은 것처럼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여행 중간 커다란 위기 때마다 결정적인 도움을 받아 여행을 끝낼 수 있었다는 것은 마치 사람의 형상을 한 신이 토마스를 돕는 듯해 보인다. 즉 토마스가 복수를 택했던 선택 또한 존중되며 선택의 여정을 끝까지 할 수 있게끔 신이 도움으로서 토마스 스스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집은 사랑이다.
이 소설의 3부작은 대략 100년을 관통하며 이야기를 교묘히 연결시켰다. 공통점으로 사랑하는 이를 상실하는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크게는 1부 집을 잃다 2부 집으로 그리고 3부 집이라는 제목으로 소설 전체에 집을 주제로 한 서사를 넣었다. 과연 집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사랑을 집이라고 이야기한다.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와 무너지지 않는 천장으로 된 집이다. (p.35)
집 대신 사랑을 대입시키면 1부는 사랑을 잃다 (사랑을 잃고 커다란 절망에 빠져 분노하고 복수를 하려다 자신마저 잃어버린 토마스), 2부 사랑으로 (사랑을 잃었지만 그와 함께 영원한 안식처로 향하는 마리아), 그리고 3부 사랑 (피터가 잃어버린 사랑을 대체할 대상으로 찾은 오도)의 테마가 완성된다.
결국 이 소설의 주제는 사랑이다. 인간은 열렬하게 사랑하다 이별하고, 이로 인해 고통을 받다가 다른 사랑으로 치유받는다. 이 사랑이라는 강력한 감정은 인류의 조상인 영장류도 갖고 있는 감정으로서 그 역사가 최소한 천만년을 거슬러간다. 소설 속에서 침팬지가 부활 및 사랑의 대체물로 상징되는 이유는 인류의 기원이면서 동시에 사랑이라는 감정의 기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 토대와 무너지지 않는 천장으로 된 튼튼한 집을 짓고 있는가? 사랑을 하고 있는가? 사랑을 상실했을 때 어떠한 태도로 임했는가?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커다란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