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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현정 Aug 10. 2019

비록 그림자가 일어서더라도

황정은 작가 소설 <百의 그림자>를 읽고 

황정은 작가의 세계에서는 호흡을 가만히 가라앉히게 된다. 하루에도 百의 그림자가 일어나는 만만치 않은 일상에서 그녀는 거창한 언변으로 설교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고요함 속에 뿌연 상념들을 가라앉히고 마뜨료슈까처럼 공허한 인생을 살지 마라며 따뜻한 국물을 한 모금 건네는 듯하다. 


오늘 하루에도 의 그림자가 일어난다.

이야기는 철거를 앞둔 전자상가를 일터를 둔 사람들을 배경으로 한다. 그들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림자가 일어서는 이유는 모두 제각각이다. 건설노동 현장에서 사고로 숨진 남편의 죽음이 억울해서, 일터를 잃을지도 모르는 두려움과 아버지를 대신하여 채무를 갚아야 하는 삶의 무게로 인해, 자식을 어렵게 유학을 보냈으나 아버지로서는 자식에게 무시당하는 서글픔으로 등. 그림자는 외로움과 근심이 깊어질수록 짙어지고 길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면 육신과 정신을 그림자에게 빼앗기고 만다.

작가는 그림자가 일어나는 것이 오로지 개인의 사정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가족이 있지만 홀로 종이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 그러다 박스를 줍는 영역을 침범받아 싸운 일로 그림자가 솟구쳐 허망한 죽음을 맞는 할머니가 있다는 것. 우리는 이러한 죽음이 이 사회에서 존재한다는 것이 비록 숱하더라도 자연스럽지 않음을 인지하며 연민의 감정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획일화라는 편리함.

전자상가 철거를 정당화하기 위해 언론에서는 기존 전자상가 상인들을 향해 빈민층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뜻의 ‘슬럼’이라는 단어를 앞세운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이라고 간단히 정리해버린 것이다(p.115). 

이 단어의 힘은 무섭다. 알고 보면 수십 년간 상인들은 이곳에서 돈을 벌고 일가를 이루며 기술자로서 기술을 연마해왔다. 평범한 우리 주변의 공간일 뿐이다. 그저 편리를 위해 ‘슬럼’이라고 획일화시킨다면 우리의 삶은 벗겨도 벗겨도 똑같은 인형이 나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리는 마뜨료슈카가 되는 것이다. 


“가마가 말이죠, 전부 다르게 생겼대요.
언젠가 책에서 봤는데 사람마다 다르게 생겼대요. 
그런데도 그걸 전부 가마,라고 부르니까, 편리하기는 해도, 가마의 처지로 보자면 상당한 폭력인 거죠.(p.38)

노래할까요.    

그림자는 어찌 되었던 내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나와 함께하는 것이다. 그림자가 일어섰을 때 이를  누르는 힘, 그리고 그림자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지 않게 하는 힘은 결국 우리에게, 사람에게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는 은교와 무재의 친절하고 사려 깊은 사랑의 행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가 갖고 있는 고민을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이것을 나누고 공감하며 장황하지 않은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그림자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주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으로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 뜻이 전달되어 그들의 배는 조금 더 따뜻해진다. 소설의 마지막에 은교와 무재는 어둡고 낯선 길을 따라 선착장으로 향한다. 그들 뒤로 그림자가 따라오는 것을 알지만 손을 잡고 의연하게 앞으로 천천히 나아간다. 그리고 말한다.

노래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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