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건 바다가 아니야
여름이면 유년의 시간이 더 그리워지는 건 해운대가 고향이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고층빌딩과 아파트들로 그 예전의 해운대를 기억하며 느끼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그래도 해운대는 해운대.
유치원 때 장산에 있는 군부대에 위문공연을 갔었다. 군인 트럭을 타고 산길을 구불구불 올라가는데 차가 굴러 떨어질 거 같아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다. 어려서 너무 무서웠다. 도착해서 내려다보니 내 눈에는 큰 건물 하나와 바다만 보였는데 그 건물은 극동호텔이었다.
우리는 유치원에서 배운 남방춤을 추며 부대 공연을 했는데, 이 춤은 크리스마스 때도 추었다. 그때는 남방춤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학교를 다니고서야 남방춤이 어느 나라 춤인지 알게 되었다.
지금 초고층 L아파트가 들어서있는 곳은 원래 미군부대 자리였다. 이 미군부대에서는 7월 미국의 독립기념일이 되면 불꽃놀이를 했다, 오빠와 언니와 동생 우리 4남매는 옥상에서 후레시로 자연도감 책을 비춰가며 밤하늘 별자리도 찾고 불꽃이 터지는 것을 보면서 여름밤을 보냈다.
39번 40번 버스 종점 앞의 해운대전신전화국, 버스 종점 옆의 우체국, 31번 버스 종점 옆의 구멍 뚫린 쇠상판으로 복개를 했던 작은 하천길, 중1동 동사무소와 부산은행 건물. 해운대구청이 들어서기 전 정원이 아름다웠던 해운대온천장은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묵던 여관이다. 이곳은 연못과 작은 아치형태의 다리가 있었는데 여기서 찍은 사진을 아직 가지고 있다.
어머니와 목욕을 갈 때는 해운대원탕온천을 갔었고, 우리 자매끼리 갈 때는 청풍장온천에 자주 갔었다. 청풍장 마당에 소나무들은 아직 있을까. 청풍장온천은 어쩌면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버스노선도 바뀌었고 고가도로와 터널들로 송정과 기장이 이어지고 지하철이 다니지만 구시가지의 모습이 그립다.
31번 버스 종점 옆에 작은 해운대서점이 있었다. 나는 6학년 때 그 서점에 혼자 가서 처음으로 책을 샀는데 <안네의 일기>이다. 어떤 내용인지도 몰랐고, 가지고 간 돈에 맞았고 그냥 동그란 눈으로 웃고 있는 단발머리 여자아이 앞표지에 강렬하게 끌려 샀던 것이다. 집에 와서 책 속에 안네의 가족들이 숨어 지냈던 네덜란드 운하 옆 은신처 건물 사진들을 보며 안네의 읽기를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다. 나중에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안네처럼 내 일기장에 이름을 지어 일기를 적었는데 그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는 버스를 타면 꼭 바다가 보이는 쪽으로 서거나 앉았다. 요트장이 들어오기 전 수영비행기장 건너편 바다는 그야말로 금빛 은빛 반짝이는 바다였다. 오염되어 시커먼 물이 흐르던 수영강을 지나갈 때는 버스 안에서 코를 막고 창문을 닫아야 했지만.
그리운 건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그 장소 그 시간 속에서 받았던 사랑들, 느꼈던 수많은 마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