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로 만든 인연

러너는 다 착해

by 지음

여행을 준비하던 몇 달 동안 뉴스는 연일 동남아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건 사고를 전했다. 걱정을 끼칠까 싶어 부모님께조차 한 달 살기를 떠난다고 말하지 못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면 관광객이 적어진 지금이 여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여행이지 않은가. 때문에 가슴에 가장 먼저 새긴 단어는 '안전'이었다. 안전이 모든 선택의 기준이었다.


그런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말레이시아, 그것도 조호바루에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을 때,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Hi from Malaysia, Johor Bahru. Let's run together."


짧은 문장이었지만, 반복해서 읽었다. 낯선 도시에서, 낯선 사람이, 가족이 있는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에 불안이 고개를 들었고, 신종 스캠(Scam)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마음 한편에 걸렸다. 그래서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 가족이 조호바루에 도착한 뒤, 그가 다시 안부를 물어왔다. 걱정스러웠다. 애써 그의 친절을 무시하며 하루, 이틀 답장을 미뤘다.


그 사이 나는 이 도시를 걷고, 뛰고, 바라보았다. 며칠간 경험한 이 도시는 조용했고, 꽤 안전했다. 가족과 함께 길을 걷는 동안에도 호객행위 하나 없고 길모퉁이마다 경찰서가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웃음을 건네는 사람이 많았다. 그 사소한 경험들이 마음의 긴장을 조금씩 풀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그의 문자에 답했고, 함께 달리기로 약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최대한 밝은 낮 시간에, 점심 무렵으로 약속 시간을 잡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우스운 생각이다. 범죄를 저지르려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달려서 도망칠 수 없을 텐데, 이런 어수룩한 발상은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다.


"Hi, my name is Marzuki"


그를 마주하는 순간, 의심의 먹구름은 생각보다 쉽게 사라졌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첫인상은 단정했다. 무엇보다 러너 특유의 에너지를 풍겼다. 다부진 체격에, 몇 번 신지 않은 아디다스 아디오스 프로4를 신고, 가민인지 순토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러닝 스마트워치가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 또, 태양을 가려줄 씨엘르 모자까지. 말보다 먼저, 그가 러너임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러너 사이에 복잡한 인사 따위는 필요 없다. 짧은 인사와 함께 가볍게 몸을 풀고 신발을 고쳐 신었다. 우리는 호수 공원 옆 산책로를 따라 달리며 서로의 호흡을 살피고, 나란히 페이스를 맞췄다. 말은 거의 없었지만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발소리로 서로를 느낄 수 있었다.


십수 년 동안 사용한 언어도, 살아온 문화도, 달려온 시간의 궤적도 달랐다. 하지만 함께 달리는 순간만큼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달리기를 통해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그와 함께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운동이 끝났을 때, 그는 더 이상 도망쳐야 할지 모르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조호바루에 사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905e9ae9-87fa-4919-bdd8-3baa5a18a681.jpg 선물 받은 모자를 착용한 두 번째 만남과 러닝

금강산은 오르지 않았지만, 짧은 운동으로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위해 가까운 식당에 들어갔다. 커피와 차를 시키고 달리기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그의 말과 다르게 달리기에 대한 열정은 그 누구보다 뜨거웠다. 내가 어떻게 달리기를 시작했는지, 어떤 신발과 장비를 사용하는지, 또 어떻게 훈련했으며, 어떤 대회를 준비하는지 쉼 없이 대화했다.


그렇게 즐거운 식사가 끝나갈 무렵.


"These are gifts for you and your daughter."


그의 두 손에는 콘택트렌즈, 러닝 모자 그리고 내 딸을 위한 인형이 담겨있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를 만나기 위해 두 손 무겁게 찾아온 그와 달리, 나는 도주(?)를 위해 온몸을 가볍게 비우고 나갔다는 사실이 떠올라 새삼 부끄러웠다.


만나기 전까지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고 솔직히 털어놓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제야 마음속에 남아 있던 미안함을 내려 놓을 수 있었다.


다소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도 운동 후에는 맛있다. 하물며 함께 달린 친구와 달리기 이야기를 나누며 먹는 점심은 어떻겠는가. 우리는 쉴 새 없이 먹고 떠들며 즐거운 마음으로 접시를 깨끗이 비워냈다.


그를 만나기 전 짧았던 내 생각과 가벼운 내 손을 자책하듯, 나는 결승점을 10미터 앞에 둔 러너의 마음으로 계산대로 달려가 점심값을 치렀다. 그는 웃으며 다음 식사는 자신이 계산하겠다며, 내가 싱가포르로 넘어가기 전에 다시 만나 함께 달리자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달리기 하나로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언어도, 국적도, 배경도 다르지만 같은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는 이유만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


생각해 보면 꽤 단순한 이유였다.


역시, 러너는 다 착해. 적어도 함께 땀을 흘리는 시간 동안만큼은.


Runner's Tip

낯선 도시에서 낯선 이와 함께 달리는 것은 꽤 근사한 모험이지만, 그 모험의 성공 여부는 사실 ‘어디서 달리느냐’보다 ‘달린 뒤 무엇을 먹느냐’에 달려있을지도 모른다. 여기, 의심을 우정으로 바꿔준 조호바루의 다정한 장소들을 소개한다.


첫 만남 장소였던 선웨이 에메랄드 레이크(Sunway Emerald Lake)다. 잔잔한 수면을 닮아 평탄하게 이어지는 약 1킬로미터 코스가 인상적이다. 인공 호수를 중심으로 한 바퀴 도는 구조라 처음 찾는 러너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가벼운 아침 산책부터 조깅, 대회 전·후 몸을 푸는 회복 런까지 모든 러닝을 즐기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곳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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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웨이 에메랄드 레이크

그와 두 번째 만남에서 함께 식사했던 로스트엔 커피(Roast & Coffee). 현지인과 관광객이 즐겨 찾는 유명 식당으로, 다양한 말레이시아 음식을 제대로 경험해 볼 수 있다. 운동 후 땀이 채 식기 전에 들어가도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분위기가 편안하다.


조호바루의 명물인 바나나 케이크를 살 수 있는 'Hiap Joo Bakery & Biscuit Factory'와도 도보 거리라 함께 들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맛있는 식사 뒤 달콤한 마무리까지, 러닝 이후 하루를 완성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동선이 있을까.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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