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오후

유쾌한 미완성

by 지음

숙소가 있는 신도시는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고 싱가포르와 가까웠다. 굳이 3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조호바루 센트럴(구시가지)까지 나갈 일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하루는 정돈된 도로와 익숙한 동선 안에서 흘러갔다. 그럼에도 이 도시의 센트럴을 달리지 않는다면, 앙금 없는 찐빵을 먹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IMG_3469.HEIC 노을 진 하늘

여행지에서의 러닝은 늘 그렇다. 가장 편한 길을 버리고, 일부러 불편한 쪽으로 몸을 옮길 때 비로소 그 도시가 가진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조호바루의 센트럴 러닝도 그랬다. 관광 가이드북에는 나오지 않는 낡고 복잡한 길들에 들어서는 순간, 그들의 삶에 한걸음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시티 러닝을 위해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렇게 알게 된 '쿠칭(Kuching) 런'. 쿠칭은 말레이어로 고양이라는 뜻이다. 조호바루의 구시가지, 공원, 관광지 등 명소를 따라 약 11킬로미터를 달리고 나면 지도 위에 고양이가 완성된다. 귀와 꼬리까지 제법 또렷한, 귀여운 고양이다.


출발 전, 여행을 준비하며 미리 저장해 둔 맛집 리스트를 확인했다. 그중 '우드파이어(Woodfire)' 수제버거 가게가 쿠칭 런 코스 위에 있었다.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정확한 위치였다. 운동 후 저녁식사로 완벽한 동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오후 4시.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을 너머로 기울고 있었지만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기온 27도, 습도는 80퍼센트를 훌쩍 넘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는 느낌이었다. 수분을 몸속 깊은 곳에 저장하듯 물 한 컵을 비우고, 신발 끈을 묶고 일어서는데 점심을 가볍게 먹은 탓일까. 배가 고팠다. 하지만 이때는 몰랐다. 이 허기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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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첫 조호바루 센트럴 러닝이 시작되었다. 달리는 걸음걸음이 즐거웠다. 땀은 비 오듯 흘렀지만, 눈에 담기는 풍경이 모든 걸 상쇄했다. 이국적인 거리, 낯선 간판, 느릿하게 걷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사진을 찍고, 다시 달리고, 또 멈춰 서기를 반복했다. 추억을 만드는, 기억을 모으는 러닝이었다.


지도 앱 위에 그려지는 선은 조금씩 고양이의 형태를 갖춰갔다. 머리와 귀는 비교적 수월했지만, 앉아있는 고양이의 허리와 꼬리는 참 길게 느껴졌다. 6킬로미터 즈음 달렸을까. 곳곳에서 시원한 바람과 함께 불어오는 버터 향과 커피 내음, 숯불에 구워지는 달큼한 고기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잠시 쉬어가라는 듯, 당장 멈추라는 듯 격렬하게 손짓했다. 배가 고픈 러너에게 너무 잔인한 곳이었다.


유혹을 억누르며 얼마나 더 달렸을까. 햄버거 가게 앞에 다다르자 무언가에 홀린 듯, 누구보다 빠르게 문을 열고 들어서 버섯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시켰다. 메뉴판을 오래 보지도 않았다.


먼저 나온 음료수를 빠르게 마셨다. 얇디얇은 빨대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이어, 주문한 햄버거가 나왔다. 햄버거를 앞에 두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내, 땀이 마르기도 전에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바삭한 빵, 육즙, 그리고 소스까지. 입 안에서 버터가 열기에 녹아내리듯, 나의 의지는 사르르 녹아내렸다.

IMG_3326.HEIC 5분 만에 사라져 버린 햄버거와 감자튀김

그 순간, 쿠칭 런에 대한 목표도 녹아내렸다. 끝까지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정신을 차리고 땀에 젖은 손으로 지도를 다시 열어보니, 고양이는 아직 다리를 다 그리지 못한 채 멈춰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미완성이 오늘의 러닝을 더 닮아 보였다. 고양이의 꼬리가 조금 짧아도, 다리가 삐뚤어져도 문제 될 건 없었다. 달리기는 계속될 테니까. 그리고 이 도시는, 다음에도 나를 달리게 만들 테니까. 언제든 다시 도전할 수 있으니까.


아, 배부르다.

516908027_10161556274150994_267746663981517592_n.jpg 누군가가 완성한 고양이 런

Runner's Tip

러닝크루명: @routekuchingcrew

모임장소: Dataran Bandaraya, Johor Bahru일정: 매주 금요일 저녁 8:30


이름 그대로 쿠칭 런(Kuching Run) 코스를 자주 즐기는 크루다. 인스타그램 DM으로 참가 신청을 할 수 있고, 참가 비용은 없다. 유명 관광지를 달릴 수 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할 수 있다.


조호바루에서 수준 높은 수제 버거를 맛볼 수 있는 로컬 햄버거 체인점이다. 말레이시아 현지 물가를 고려하면 가격은 다소 비싼 편이지만, 한국의 인기 버거 맛집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맛을 자랑한다. 무엇보다 쿠칭 런 코스 위에 위치해 있어 러닝 후 자연스럽게 들르기 좋다. 운동으로 비워낸 에너지를 든든하게 채우고 싶다면, 기억해 둘 만한 선택지다.

해가 질 무렵 달리기 시작했다면 운동 후 멜드럼 워크 스트리트 푸드(Meldrum Walk Street Foods)는 빼놓을 수 없다. 조호바루 센트럴 인근에서 저녁이 되면 자연스럽게 열리는 로컬 야시장이다. 해가 지고 나면 좁은 골목을 따라 노점들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그릴 위에서 고기 굽는 소리와 향신료 냄새가 거리를 채운다. 러닝 후, 길가에 멈춰 서서 먹는 꼬치와 맥주 한 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있지 않은가.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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