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여섯 시간 후, 여름

적도의 여름에서 운동화 끈을 묶다

by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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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하늘길로 여섯 시간. 한국 겨울의 초입에서 동남아의 한여름으로 들어서는 데 걸린 시간이다. 비행기가 멈추자 낯선 외국어가 기내를 채웠다. 그제야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실감했다.


그도 잠시, 나는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까?’


십수 년 동안 문화예술 기획자로 지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직장인의 시간을 지나, 일한 만큼 버는 프리랜서의 삶도 거쳤다. 지금은 몸과 시간의 여유를 택했다. 대신 마음의 짐은 켜켜이 쌓였고, 지갑은 가벼워졌다. 다소 조용하고, 어쩌면 조금은 지루한 삶이었다.


그러던 중 양쪽 무릎 수술을 했다. 재활을 위해 시작한 달리기와 수영은 예상보다 큰 변화를 가져왔다.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던 해, 지역 육상대회에서 800미터 주자로 나간 기억 이후로는 제대로 달려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달리기만큼은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남아 있었다.


현실은 달랐다. 수술 후 몇 달이 지나도 무릎은 쉽게 붓고, 400미터를 채 달리지 못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착각은 빠르게 사라졌고, 대신 아주 느리게 달리기를 알아가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빠르지는 않지만, 이제는 대회에서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하는 사람이 되었다. 삶의 많은 부분이 가족과 달리기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이제는 나 자신을 러너, 더 나아가 마라토너라고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이 책은 가족과 함께한 여행의 틈새에서, 내가 달리며 만난 세상에 대한 기록이다.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의 국경에서, 인도네시아 빈탄의 자연 속에서, 싱가포르 빌딩 숲에서. 발걸음을 옮기며 생경한 도시와 가까워졌던 순간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여행의 끝자락, 싱가포르 마라톤은 이번 여행의 조용한 마침표가 되었다.


나와 함께 초록이 무성한 '그린 트라이앵글(Green Triangle)'을 여행해 보지 않겠는가.


적도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운동화 끈을 묶고 시작하는,

조금 다른 방식의 여행을.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