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함이 가르쳐준 것들

객기에서 겸손으로

by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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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기온 33도, 습도 95%. 태양이 가장 자신감 넘치는 시간이다.


수치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이 날씨에 말레이시아 조호바루의 하늘은 심술궂게도 맑았다. 가끔 내리는 여우비는 뜨겁게 달아오른 아스팔트를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가득 찬 두꺼운 유리벽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그저 예쁘게 펼쳐진 러닝 코스처럼 보였다.


'더워봐야 여름이지. 나 33도에도 20km씩 LSD(Long Slow Distance) 러닝 하는 사람이야!‘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아프리카 사람이 여름의 한국을 덥고 습하다 혀를 내두르고, 러시아 사람이 한국의 겨울을 춥다고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나의 체력을, 경험을 맹신했다. 마라톤 메달이 주는 자신감은 어느새 무모한 오만으로, 그리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객기로 번져가고 있었다. 별다른 망설임 없이 말레이시아 조호바루의 여름과 정면 승부를 하기로 했다.


며칠 전 마라톤을 꽤나 빠르게 달린 탓에 근육은 아직 묵직한 피로를 머금고 있었다.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식염포도당 두 알을 삼키고 이온음료를 마셔 넘겼다. 신발 끈을 조이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목적지는 이국적인 건축물과 풍경에 흠뻑 취할 수 있는 조호바루 정부 사무소(Pejabat Kerajaan Negeri Johor)를 지나 바다 건너 싱가포르가 보이는 푸테리 하버(Puteri Harbour)까지, 약 7.5킬로미터.

운동 후 마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기분이 좋으면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한 잔을 마셔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여유를 부렸다. 상상만으로도 벌써 발바닥이 간질거렸다.


숙소를 나서자 상상은 비명이 되었다. 누군가 나를 습식 사우나로 몰아넣고 물먹은 큰 수건을 어깨 위에 올려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내디딘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185 bpm의 EDM이 약속이나 한 듯 내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착, 쿵, 착.


초록이 짙은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발소리와는 묘하게 잘 맞는다.


초반 2킬로미터는 나쁘지 않았다. 텅 빈 인도에서 고급 빌라 단지의 담벼락을 끼고 달리는 기분은 묘한 우월함마저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인도가 끊기면서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잡초가 무성한 잔디밭과 갓길 없는 차도. “걷는 사람이 없어 인도가 없다”는 친구의 농담이 뼈아픈 진실로 다가왔다. 차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한없이 차가운데, 내가 마주한 태양은 잔인할 만큼 뜨거웠다.


햇빛은 정직했고, 그늘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다. 바람은 멈췄고, 내 어깨에 올려져 있던 손수건은 솜이불처럼 변해 온몸을 덮어 몸 안의 수분을 쥐어짜 냈다. 이에 화답하며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듯 온몸에서 땀을 뿜어냈다. 급수대는커녕 작은 편의점조차 보이지 않는 황량한 도로에서 내가 ‘안다’고 믿었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의미가 없었다. 드넓게 펼쳐진 멋진 풍경 앞에서 내 얼굴은 속절없이 일그러졌고, 짧은 숨을 몰아쉬었다. 잘 정돈된 잔디, 낮게 늘어선 건물들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드디어, 아지랑이 너머로 조호바루 정부 사무소가 흐릿하게 보였다.


'예쁘다'


이국적인 풍경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건물은 맹렬하게 피어오르는 지열로 흐릿해졌다.


뙤약볕 아래에서 웨딩 촬영을 하고 있는 예비부부가 존경스러웠다. 반대편 길에서 열정적으로 달려오는 러너에게 땀으로 젖어버린 엄지손가락을 간신히 들어 올려 보였다. 마치 물 위로 꺼내달라는 구조 신호처럼.


사진을 찍고 다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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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아직 보이지 않는데 햇빛은 점점 더 날카롭게 피부를 파고들었다. 머리부터 시작된 땀방울은 눈을 찌르고 난 뒤 온몸을 타고 급류를 만들더니 손가락 끝까지 번졌다. 길은 계속 이어졌고, 목적지는 여전히 2킬로미터 앞에 있었다. 무거워진 발만큼 속도 역시 처참히 느려졌다.


도착 예상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날씨도, 습도도, 거리도 아니었다. 내가 ‘안다’고 믿었던 것들, ‘할 수 있다’고 가볍게 여겼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라면 30분이면 충분히 달렸을 7.5킬로미터의 짧은 거리가, 이곳에서는 멀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늘 없는 오후에 신발끈을 묶을 때부터,

물병을 챙기지 않았을 때부터,

속도를 낮추지 않았을 때부터,

나는 이미 잘못된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얄팍한 경험은 자신감을 만들었다. 그 자신감은 눈덩이처럼 불어 오만이 되었고, 이내 아집과 객기로 이어진 것이다. 무모함은 늘 자신감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낯선 환경 앞에서 가장 먼저 무너진다. 심박수는 이미 한계치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푸테리 하버의 멋진 요트들은 아직 보이지 않는데, 내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지열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터질 듯한 심장 고동을 억누르며 한 단어를 떠올렸다.


‘겸손’


그리고 이 뜨거운 태양을 어떻게 안전하게 벗어날 것인가,

생존을 위한 처절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Runner's Tip

누가 만약 열대 지방에서 낮에 달리는 법에 대해 내게 묻는다면, 나의 첫 번째 대답은 ‘달리지 않는’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기어이 뜨거운 열기와 한판 승부를 벌이겠다면, 여기 너무나도 당연한 몇 가지 조언이 당신의 생존율을 꽤 유의미하게 높여줄지도 모르겠다.


내가 조호바루의 뜨거운 지열 위에서 온몸의 수분을 쥐어짜 내며 얻은, 말 그대로 생존 팁이다.


동남아시아에서 오후 러닝을 한다면 잊지 않아야 할 몇 가지가 있다. 탈수를 방지하기 위해 식염 포도당을 꼭 섭취해야 한다. 물은 반드시 휴대하고 목이 마르기 전 자주 마신다. 또,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그늘을 찾아 달려 열사병을 예방한다. 끝으로 가능하다면 해가 뜨기 전이나 진 후 달리는 것을 추천한다.


조호바루 정부 사무소 주변은 넓고 평탄한 공원으로 신호에 멈출 필요가 없어 거리와 속도에 상관없이 달리기 좋다. 공원의 한쪽 끝에는 푸테리 하버, 다른 한쪽 끝에는 쇼핑몰이 있다. 다만, 그늘이 없으니 낮에 달린다면 더위를 조심해야 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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