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lli Jan 08. 2022

3일간의 늦잠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모든 무대가 그러하듯, 그 뒤에 남는 건
말해지지 않는 쓸쓸함 뿐이다.

1년의 시간이 끝나고 학기말 방학에 접어들었다. 졸업식이 끝난 저녁, 세 학급밖에 안 되는 동학년과 자축하는 시간을 갖고 다음 날 늦게까지 잠을 잤다. 사실 다음 날에도 일어나서 처리할 일들은 있었는데 오후 3시가 될 때까지 침대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전 날 술을 많이 마시지도, 울지도 않았는데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다. 그간의 피로와 고단함이 아직 몸 안에 가득 쌓여있었나 보다. 겨우 일어나 씻고 학교로 향했지만 교실에 잠시 앉아있다 저녁 약속을 갔다. 나 방학한 거 어떻게 알고 친한 샘이 밥 먹자고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둘째 날도 늦잠을 잤다. 전날 그렇게 늦게 자지도 않았는데, 오전 11시에 겨우 일어났다. 1시에 점심 약속이 있지 않았으면 아마 또 오후 3시까지 잤을지도 모른다. 나를 예뻐라 하는 이전 학교에서 같이 근무했던 샘이 점심 사준다고 해서 1시에 만나서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나보다 10살이나 많지만 세상 귀여운 분이라 만나자마자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저녁에도 신규 때 같이 근무했던 샘들이 밥 사준다고 해서 아주 하루 종일 신나게 밥만 얻어먹고 다녔다. 신년부터 이렇게 밥 사주시는 분들이 많은 거보니 올해는 여기저기 많이 얻어먹고 다닐 기회가 많으려나.


셋째 날인 오늘도 1시가 되어서야 겨우 일어났다. 원래 계획은 아침 10시에 일어나서 오래간만에 청소도 하고 빨래도 돌리고 집도 정리하려고 했는데,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는 일부터가 대단한 고난이었다. (산뜻하게 맞이하는 아침은 언제부터 가능할까.) 오늘도 얼굴이 띵띵 부어있길래 땀을 한 번 내야 하나 싶어 '밖에 나가서 좀 뛸까?'라는 생각을 입 밖으로 뱉어내긴 했으나, 추운데 뛰면 죽을 수도 있으니 그런 위험한 생각은 서둘러 접어버렸다. 오늘은 아무도 만나지 않으니 한 마디도 말할 일이 없었다. 가만히 앉아 무얼 할까 생각하니 뭘 해야 할지 몰랐다. 해야 할 일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해야 할 일이 걷어졌을 때 밀려오는 시간의 공백에 꼼짝할 수 없게 된다.


학년의 마지막 날을 잘 기념하기 위해서 1년을 보내왔고 그렇게 중요한 행사는 끝이 났다. 그 공연을 위해 분주하게 준비했던 모든 일과 노력은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모두 사라졌다. 그 시간을 기억하는 건, 빈 교실에 남은 나뿐이었다. 그렇게 후달궈지며 한 달을, 한 학기를, 아니 일 년을 보내고 나니, 처리해야 할 일이 갑자기 없어진 지금이 어색했다. 이 시간을 오로지 나만의 일로 채워야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외로운 일이었다. 그래서인가, 이맘 때면 늘 며칠 동안 앓아눕곤 했다.


겨우 일어나서 아직 사소하게 남은 학교 일을 집에서 할까 했으나 '나가자' 병에 걸린 나는 주섬주섬 화장을 하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집순이로 사는 삶은 언제부터 가능할까.) 학교에 들러 노트북을 챙겨 나와 이 카페 저 카페 기웃거리다 적당히 사람 없고, 적당히 커피맛도 있는 친구 동네 카페로 와서 이것저것 업무를 처리했다. 이 일도 끝나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할까.


사실 온전하게 나를 위해 게으를 시간도 없긴 하다. 지도교수님을 만나기 전에 봐야 할 논문도 쌓여있고, 다음 주 워크숍 때 만날 샘들을 위해 미리 사 둔 책도 좀 봐야 한다. 밀리의 서재에 잔뜩 담아둔 책도 읽어야 하고, 내 몸에 쌓인 시간의 부기를 빼기 위해서는 운동도 해야 한다. 프로젝트 수업 진행한 내용이랑 책 서평도 블로그에 정리해야 하고, 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자료집에 실리는 원고 세 편도 검토해서 보내드려야 한다. 새해맞이 결심한 두 가지 다짐인 새벽에 일어나기, 매일 한 편의 글쓰기도 해야 한다. 콘서트 예매부터 하고 이제 정주행 시작한 '풍류대장'도 2월 공연 전에 다 봐야 한다. 태블릿용 올해 버전 교사수첩도 만들어볼까 생각 중이다. 아, 교육학 관련 영상도 찍겠다고 해놓고, 그건 내년에 해야 하나. 게으르지만 나름 계획쟁이인데 이렇게 해야 할 일을 어디서 어떻게 계획적으로 배치하고 해야 할지 갑자기 고민된다. 처리할 일 말고, 온전히 나와 관련된 일로 가득 채우는 시간은 언제쯤 가능할까. 그때는 모든 일이 끝나도 허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을 때, 시간에 죄를 짓는 기분을 느끼는 걸 보면 강박증 성격 장애가 아닐까 싶다. 올해는 분주함도 허무함도 없이 평온하게 지낼 수 있을까.


집가서 빨래부터 돌려야겠다.

아, 먼저 아플 차례인가.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이 뭐 특별하다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