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간 제주에 살았습니다
나 같으면 보내줘도 안 가겠다.
라고 엄마가 말했다. 제주도에서 지낸 지 1주일째 되던 날, 서귀포 올레시장 바로 앞에 있는 소박한 호텔에서 묵는 날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남은 4일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야 했고, 그럼 방 안에서 뭘 먹기가 곤란하니 오늘은 꼭 딱새우를 사서 먹겠다고 다짐한 날이었다. 어제 가본 올레시장에는 딱새우를 2만 원 이상만 팔아서 하나로마트를 갔다. 예전에 하나로마트에서 고등어회 1만 원짜리를 산 기억이 있던 터라, 혹시 딱새우도 조금씩 팔지 않을까 싶어서. 서귀포 근처에 두 군데를 갔지만 딱새우는 없었고,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방어회 1만 원짜리를 챙겨 왔다. 그리고 그냥 먹을까 하다 혹시 몰라 다시 올레시장으로 갔다. 그리고 시장 어딘가 끝자락에서 어제는 보지 못했던 1만 원짜리 딱새우 회를 찾았다. 아니 생각보다 파는 곳이 많았는데 이건 어제 내가 못 본 건지 아니면 어제는 팔지 않았던 건지는 모르겠다. 여튼 양이 많을 것(방어회+딱새우회) 같아 잠시 고민하긴 했는데, 언제 먹어볼까 싶어서 하나를 사서 돌아왔다.
작은 호텔방에는 딱히 테이블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 땅바닥에 놓고 먹을까 고민하다 캐리어를 눕혀놓고 상을 차렸다,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 한 캔과 함께. 그러고 먹으려고 하는 순간, 마침 엄마한테 전화가 온 거였다. 엄마는 뭐 하고 있냐고 물었고, 딱새우회랑 방어회 사 와서 먹는다고 하니까 혼자 무슨 재미로 거기 가서 그러고 있냐고, 엄마 같으면 보내줘도 안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아직 뭘 몰라서 그래."라고 했다. 혼자여행의 기쁨과 슬픔을 엄마가 알기엔, 엄마는 여행을 그리 많이 다녀본 적이 없었으니. 엄마는 친구랑 여행을 다닐만한 시간적 금전적 여유도 없었으니.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에는 은근 혼행은 떠나는 이들이 있다. 내 중학교 친구는 예전에 인도에 혼자 다녀왔고, 요즘 가까이 지내는 친구는 혼자 조용한 곳에 자주 간다. 사실, 나는 완전하게 혼자 여행을 온 건 처음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주로 해외를 갔는데, 계획을 세울 때는 '일단 혼자라도 가고보자.' 였지만 막상 떠날 때는 누군가와 함께였다. 아무래도 3주 가까이, 외국(게다가 난 영어를 잘 못함)이다 보니 예상치 못한 문제 상황이 무서워 함께 떠날 누군가를 찾았던 것 같다. 그 친구들과의 여행이 싫었던 적은 없다. 늘 즐거웠고, 고마웠다. 친구와 다니는 게 너무 귀찮고 불편하고 힘들어서 혼행을 온 건 아니었다. 혼자 제주에 간다고 하니 자꾸 사람들이 물어보긴 했다. 왜 혼자 가냐고. 그런데 그냥 '같이 올 만한 사람이 없던 것'뿐이었다. 게다가 외국도 아니고, 카드도 있고, 운전도 하니까, 딱히 뭐 심심한 것 외엔 문제 될만한 상황이 없어서 '절박하게' 동행을 구하지 않을 것뿐.
그래서 누군가 물어보면 "그냥, 뭐 다들 바빠서."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혼자 다녀보니 혼행의 특징을 몇 가지 알게 되긴 했다. 뭐, 혼행과 함행(함께여행) 중에서 뭐가 더 좋으냐 이런 걸 가리려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냥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정도. 우선 포기해야 되는 부분이 있다. 가장 첫 번째는 사진-! 사실 이것도 개인 성향에 따라 다르다. 지난번에 친구들하고 한라산에 올라갔을 때 보니, 어떤 혼자 온 사람은 삼각대를 세워놓고 스스로 사진을 다양한 포즈로 잘도 찍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건 못한다. 정... 궁하면 누군가한테 찍어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팔 뻗어서 찍거나, 그냥 안 찍고 말지. 그러다 보니 풍경사진을 많이 찍게 되더라. 그래서 이번 여행 내 휴대폰 사진첩에는 바다하고 숲 사진이 엄청 많다. 셀카도 있긴 하다. 사람 없을 때 바다 배경으로 찍거나, 숲길 걸으면서 영상 찍거나. 근데 얼굴만 너무 가까이라, 뭐 건질만한(?) 사진은 없다. 어승생악에 올라갔을 때 내가 표지석이랑 셀카를 찍으니 뒤에 있는 분이 안타까웠는지 사진을 한 5가지 각도로 찍어주셨다(근데 내 포즈는 다 똑같...). 애초에 찍어줄 사람이 없으니 기대 자체를 안 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나는 그랬다.
두 번째, 유명한 맛집이고 뭐건 간에 내가 고르는 음식에 제한이 생긴다. 우선 흑돼지는 2인분이 기본이다 보니 일반적인 식당에는 아예 가지를 못했다. 그래서 한참을 찾은 결과 점심특선으로 혼자서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서부에서 찾아놨었다. 점심특선으로 돌솥밥, 찌개 등등 이지가지와 함께 고기도 주셨는데 그 양이 적어 당당하게 고기 1인분을 더 시켰다. 그렇게 한 번 먹으니 굳이 또 먹으러 가고 싶은 생각은 안 들긴 했다. 그리고 한 그릇 음식을 파는 맛집(돈가스, 참치회덮밥, 크림우동 등), 즉 혼자 방문해도 괜찮은 곳만 갈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1개밖에 못 시키니까 다른 메뉴는 맛이 궁금해도 먹을 수가 없다. 아쉽지만 뭐, 혼자라도 먹을 수 있게 불편하지 않게 해주는 게 어딘가 싶긴 했다. 아, 혼자 음식 먹으니까 음식 자체에 엄청 집중하면서 천천히 먹게 되긴 하더라.
이 두 가지를 제외하면 사실 큰 불편함은 없었다. 아니, 이제 나머지는 모두 다 편한 것뿐. 그렇다고 친구랑 다닌 게 불편한 건 아닌데 신경 쓸 일이 없다고 해야 하나. (아니 근데 이렇게 쓰면 누군가와 함께 다니는 여행 가는 걸 부정적으로 쓰는 거 같은데 그게 아니라) 애인이든, 친구든, 여튼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건 즐거움도 있고 도움도 받으면서, 동시에 나도 배려를 하고 챙겨야 한다는 뜻이다. 근데 지금은 내가 나만 챙기면 되니까, 2시간 동안 해안도로 똑같은 구간을 왔다 갔다 해도 괜찮으니까, 따라부르지도 못하는 노래 똑같은 거 계속 틀어놓고 이상하게 소리지르면서 다닐 수도 있고, 거리낌 없이 드러운 짓도 할 수 있고, 피곤하면 아무 해수욕장 주차장에 차 대고 잘수도 있다. 이런게 혼행의 편한 점 아닐까. 그리고 혼자서도 잘 다닐 수 있다는 자신감(?)이라고 해야 하나.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혼자서 밥도 먹고, 혼자서 카페도 가고 (카페는 원래 잘 갔지만), 혼자서 산도 가고, 혼자서 (구석에서) 셀카도 찍고, 그런 걸 '혼자'하면서 '혼자서도 괜찮네.'라는 문장을 몸으로 체험했다고 해야 되나. 그런 걸 얻으러 간 건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대화할 사람이 없으니 자꾸 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 뭐, 굳이 멋진 말을 붙이자면 '나와의 대화' 이런 말을 쓸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나랑 대화하지는 않았다. 그냥 바다를 보면서, 걸으면서, 사람들을 보면서, 옛 기억을 떠올리면서, 음식을 먹으면서, 내가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생각이 여기 저리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는 걸 묵묵하게 지켜보았다. 말이나 글로 다 쓸 수는 없지만, 지나온 내 시간도 돌이켜보고, 옛사랑도 그리워하고, 친구들도 한 명씩 떠올려보고, 지금 나에게 있는 문제도 고민해보고, 엄마 아빠도 생각하고, 슬퍼하기도 하다, 즐겁기도 하다, 부끄럽기도 하다, 그저 멍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라는 인간이 왜 이렇게 살고 있나 하고 생각하고,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도 하고, 새로 시작하는 3월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고, 올해는 좀 빡세게 살자고 다짐도 하고, 그러면서 이 정도면 되지 않았나 놓아보기도 하고. 그렇게 파도를 따라 이리저리 생각의 시소만 타고 온 것 같다.
그런데 결국에 깨달은 건 혼자 살아온 거 같지만 늘 누군가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혼자 여행을 왔지만, SNS로, 카톡으로, 전화로, 응답해주고 연락하는 사람들. 그래서 몸은 혼자이지만 완벽하게 혼자로 외로웠던 적은 없다. 인생이란 외롭고 역시 세상은 혼자 사는거야, 이런게 아니라 '그냥 그동안 고생많았다고, 다시 잘 살아보자고' 내가 나를 다독이는 시간을 보냈다고 하면 되려나. 그래서 다시 또 혼행을 떠날 준비를 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혼행, 생각보다 괜찮네.
혼행, 다음에는 어디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