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간 제주에서 삽니다 4
그저께부터 3일간 묵는 곳은 협재해수욕장 근처의 게스트하우스이다. 이전에 갔던 게하와 달리 적당히 규모도 있고, 나름 사장님의 철칙 아래 엄하게(?) 관리되는 2층짜리 숙소이다. 오션뷰라고 해서 높은 곳인가 했는데, 그렇다기보다 큰길에서 약간 골목으로 들어간 곳에 있어서 바다 쪽으로 방향이 나 있었다. 그래서 내 방은 1층인데도 불구하고 비양도와 협재 바다가 보였다. 뭐, 대부분 커튼을 닫고 지내긴 하지만 말이다.
이 게하의 후기 중에서 눈에 띄는 문장이 있었는데 "사장님이 필요한 만큼만 친절"하시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게하 예약을 취소하고 호텔로 바꿀까 고민하다가 이 문장 때문에 그냥 두었었다. '필요한 만큼'은 어느 정도일까? 이전 게하도, 그 전 게하도 모두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그런데 그 온도 차이는 확실히 있었다. 첫 게하는 나의 어색함과 경계가 눈에 보여서였는지 몰라도 친절하셨지만 친근하지는 않았다. 호텔 프런트에서 만나는 친절한 직원의 느낌이었달까? 뭐 고작 하루 묵는 사람이니까 사장님들도 친한 척하시기에는 어색어색하셨겠지 뭐, 딱히 얘기를 나눌 일도 없고.
두 번째 게하에서는 친절이 아니라 친근함과 편안함으로 나를 맞이해줬다. 그 게하의 콘셉트는 친구 집에 놀러 온 기분으로 게스트들이 머물다 갔으면 좋겠다는, 그래서 나한테 말도 많이 걸어주고, 게스트들끼리 모여서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도 있고, (파티는 아님) 나이를 알면 누나, 형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랬다. 실제로 그렇게 친해져서 이곳에서 스탭을 한 사람도 많고, 오가면서 인연을 많이 남기는 것 같았다. 내향형 E인 나에게 그렇게 친근하게 다가와주니 처음에는 좋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내가 게스트로서가 아니라 친절한 누나로 동생인 호스트를 챙겨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머무르게 되었을 때 생긴 부작용일까.
그다음에 호텔에서 2박을 했는데, 뭐 알다시피 호텔은 친절만이 존재하는 곳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해외에서 호텔에 묵었을 때는 오가면서 스몰토크가 많아서 직원들하고 조금 가까워진 느낌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선 그런 일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문화 차이인가. 여하튼 그렇게 몇 개의 숙소를 거쳐 지금 숙소에 왔는데, 사장님이 생각보다 나이가 있는 중년의 호쾌하신 남성분이었다. 이 숙소에서 지켜야 할 내용은 분명하게 알려주셨다. 그런데 내가 숙소를 들어갔다 나갔다 할 때마다 나오셔서 인사를 해주셨다. 딱히 어디를 갔는지, 어디를 갈 건지, 물어보지도 않으셨지만 "늘 다녀오셨어요." 라던지 "다녀오세요."라던지 하면서 벌떡벌떡 일어나서 인사를 하셨다. 내가 무언가 도움을 요청하거나 물어볼 때는 적극적으로 알려주셨지만.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서 사장님께서 젊은 친구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은 정도의 거리 감각이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나를 친근하게 대해주는 곳보다 더 마음이 편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거리 감각은 사실 많은 관계에서 필요한 감각이다. 특히 직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일을 할 때 적당한 거리감은 반드시 필요하다. 때로는 적당한 거리를 조절하지 못해 난처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업무적으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지시를 하거나, 잘못한 부분을 지적해야 하는데, 그와 내가 가까운 사이에 있으면 오히려 말하기가 더 꺼려지는 것이다. 이럴 때는 2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아예 완전 직장인 콘셉트로 칼 같이 거리를 두고, 친절하지만 먼 그대가 되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사적으로도 완전히 친해져서 상호 신뢰를 갖고 그런 피드백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거다. 두 번째 방법이 더 편하고 좋긴 하지만 사실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하고 그렇게까지 일로도, 개인적으로도 잘 맞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점점 첫 번째 방법으로 친절하면서 선을 긋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사실 그게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의미 없는 인간관계를 맺는 일에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그래도 삶에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과 보낼 시간도 부족한데, 그냥 유쾌하고 재미있다고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일에 대해선 피로감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그 중간 어느 사이에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일적인 관계, 적당한 선을 그으면서 친절한 관계로만 지내고 싶은데 간혹 상대방이 개인적인 관계로까지 발전시키고 싶어 내가 그은 선을 넘어오는 일이 있다. 나는 안 궁금한데 자신의 힘든 개인사를 말한다거나(그렇다면 나는 일단 잘 들어주고 공감해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적인 영역에 나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게 서로 간에 같은 정도의 호감을 갖고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어쩌면 그(여기서 그는 남녀 모두를 칭한다)는 내가 그를 생각하는 것보다, 나와 훨씬 더 친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그렇다면 내가 업무적으로 무언가를 요청할 때 (혹은 수정을 요구할 때) 제대로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경력은 내가 많지만 (교사는 모두 평등한 직급이기도 하고) 특히 그가 나보다 나이까지 많은 경우, 내가 그에게 무언가 업무적 지시를 내리기란 쉽지 않다. 교육활동이 다분히 처방적 행위라서 더욱 그렇다. 개인적 관계가 업무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 쉽게 말해 당신의 학급운영이나 교육 실천이 잘못됐으니 고치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와 나의 (애매하게) 가까운 관계 때문에 그런 말과 지시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아니 종종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은 1년은 함께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1년 간 지속된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보면, role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직장인으로서의 role을 해야 하는데 사적 관계의 position이 role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같은 학교 선생님들, 특히 업무적으로 엮여있는 경우 엄청 가까이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 (아까 말했지만 엄청 친해지는 방법도 있고) 농담 삼아 친한 친구들끼리 한 학교 모여서 근무하자고 하지만, 종국에는 그러다가 서로 싸우고 안 볼 수도 있으니 그러지 말자로 끝난다. 업무에 감정이 섞이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생기는 것. 일이라는 게 그런 거 같다.
적당히 필요한 만큼 친절한 숙소 사장님, 자신의 role에 충실한 사장님을 보니 괜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중간한 거리감으로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그도 함께. 그런데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였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