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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lli Apr 17. 2022

붉은 달

붉은 달을 보았다.

붉은 달을 담고 싶어, 한참을 달려갔다.


눈이 맑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어느 순간 능글맞은 여우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좋은 사람에게도 덜 좋아하는 척을 하게 되었고, (아직 잘 안되긴 하지만) 싫은 사람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짧은 대화도 할 수 있다. 너의 적당한 곤란함 쯤은 모르는 척 넘어가기도 하고, 괜히 다 알면서도 눈치 없는 척 너에게 살짝 부담을 줄 수도 있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지만, 너의 시선이, 너의 표정이, 너의 손끝이, 너의 말들이 머무르는 곳이 내 눈에는 너무나도 빠안히 보여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연기력이 느는 일이, 그 뻔뻔함의 정도가 깊어지는 게 어른이 되어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서글프게도_


동주처럼 살고 싶었는데,

이제는 잎새에 이는 바람 따위에는 괴로워하지 않는다. 세상 괴로울 일은 차고 넘쳤고, 눈에 보이는 걸 보지 못했다고 넘어가지 못해 아파하던 시절은 지나갔고, 지금은 보면서도 안 보인다고 눈 가리며 아웅 하는 시절을 보내고 있다_


교수님, 저는 학자가 아니라 시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이도 저도 아닌 이가 되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글자를 아무렇게나 써재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눈이 맑은 사람으로 나이 들고 싶었는데, 뿌연 안개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_


그런 생각을 하다 붉은 달을 보았다.

붉은 달을 담고 싶어 한참을 달려갔다.

너도 붉은 달이 보이냐고 묻고 싶었다.


나는 결국 닿지 못했지만,

너는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라도 붉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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