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어디서 취하면 되나요?
이 이야기는 팩션입니다. 팩션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한국식 영어 단어로, 사실을 바탕으로 한 실화나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 픽션을 섞어 재창조하거나 더 나아가 가상의 사건·인물을 덧붙이는 행위 또는 그렇게 탄생한 작품을 의미합니다. 소개팅 당사자는 여러 사람이 모인 인격들로, 허구의 인물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래서 연인이 갖고 있는 습관 중에 제일 싫은 건 뭘까요'
'게임을 밤새도록 하는 거'
'안 씻는 거'
'연락 잘 안 하는 거'
달에 한두 번씩 모이는 미혼의 직장 동료들과 연애 토크를 하고 있었다. 제일 싫은 습관이라.. 뭐니 뭐니 해도
'난 주사. 주사는 정말 싫어'
주사가 있는 건 그 어떤 습관보다 최악이다. 대화가 불가능하니 이성적으로 설득이 불가능하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주사쟁이는 힘도 세져서 어떤 행동도 막을 수가 없다. 나 또한 주사가 있기 때문에 취기가 오르는 어느 순간부터는 술을 꺾어마신다. 그 정도는 이제 한다.
떡볶이를 집어 먹던 김 선생이 말했다.
'그러게요. 예전에 전남친이 술 마셨길래 제가 차로 데리러 갔거든요. 근데 운전 중에 저랑 싸우다가 갑자기 열받는다고 차문을 열었어요.'
'미친 거 아님 그건 둘 다 죽자는 건데'
'그래서 그다음 날 헤어졌죠 뭐.'
'서비스 안주 드릴게요 쥐포튀김입니다'
'와 감사합니다'
얘기하는 도중 호프집 점장님이 서비스 안주를 갖다 줬다. 내가 모임의 주동자라는걸 눈치챘는지 유독 나에게 살갑다.
'난 내일이 소개팅이라 이것만 마시고 일어납시다'
'낼은 누구랬죠? 프로그래머?'
'응 컴퓨터 관련 일 한다던데'
계산을 하러 가니 점장님이 미소를 띠고 카드를 받는다.
'오늘은 일찍 가시네요'
'네 내일 일이 있어서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뵈어요'
좋은 분이다. 나가는 손에 박카스도 들려줬다.
만날 장소를 정할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근교에 꽃이 가득한 예쁜 카페를 찾아내서 거기서 만나잔다. 차가 없다고 하니 데리러 온단다. 매너가 엄청난 사람이다. 대학시절에 농구를 꽤나 했다고 한다. 어깨랑 가슴이 깡패라고 주선자가 기대하라고 했다. 기대할 정도의 몸짱 프로그래머라.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듣던 대로 어깨가 장난 아니시네요'
'아 주선자가 그러던가요 걔는 저보고 맨날 그 얘기해요'
'꼭 어깨랑 가슴을 강조해서 칭찬하라고 하더라구요.'
'미친놈입니다'
'하하하'
첫 대화부터 웃음이 나왔다.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다. 일에서도 열정적이다.
'전 제가 짠 코드들 사람들에게 다 공유해요.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이 공부하고 더 발전시키고 그러더라고요'
'완전 멋지신데요. 카피레프트 같은 개념인가요'
'네 그렇게 저도 다른 사람들 코드 보고 배우기도 하구요'
오 건전한 생각을 가진 프로그래머다. 생각도 몸도 짱짱맨이구나.
'가르치는 거 힘드시죠. 저는 남 앞에 나서는 거 너무 힘들어해서 수업하는 거 그것만으로도 존경스러워요'
'저는 일인걸요. 아직도 애들 앞에 서면 긴장 많이 해요. 분필을 안 든 손은 가끔씩 보면 주먹을 꽉 쥐고 있어요.'
'잘하려고 그러시는 거죠. 매너리즘도 없으신가 봐요. 멋지세요'
서로의 직업세계를 알아가며,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지 탐색하며 그렇게 첫 번째 만남이 끝났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간단하게 반주를 하기로 했다. 자주 가던 호프집을 갔다.
점장님은 웬일이냐는 표정으로 눈이 휘둥그레지며 예의 그 미소를 띠웠다.
맥주를 한 잔 두 잔 마시며 사는 얘기를 했다. 어디에서 살았고, 무엇을 했고,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점장님이 슬쩍 와서 또 서비스를 주고 간다.
'우리 호프집 시그니처 칵테일이에요. 서비스입니다'
'와 감사합니다'
시그니처칵테일은 처음이다. 센스 있는 점장님이다. 안주를 먹으면 배가 나올 것 같아서 과자 몇 개만 조금씩 집어먹고 있었는데 술을 서비스로 주다니.
그에게 칵테일을 권했더니 단숨에 마셨다.
취기가 올랐는지 그는 같은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코드를 잘못 짰는데도 작동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르고 그냥 계속 가는 거죠.'
'아 네 코드를 잘못짰는데 작동이 되니까 원인 분석을 못하고 덮었다는 거죠?'
'아니요 코드를 잘못 짰는데 그게 되더라니까요.'
도돌이표다. 안 된다. 몸짱맨이여 이상 작동을 멈춰라.
'아 네네 그럼 오늘은 이만 마시고 일어나요.'
'아 싫어요 끝까지 마셔요. 후우. 같이 놀아요'
'집에 가시지요. 대리 불러드릴게요'
'같이 마셔요 가지 말아요'
계속 마시겠다는 그를 테이블에 둔 채 카운터로 갔다.
점장님이 계산을 한 후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가슴 앞에서 검지 손가락을 교차하며 엑스표를 두 번 그렸다. 그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나는 테이블 위로 고꾸라진 그를 뒤돌아 보며 한숨을 지었다.
한 잔 더 하자는 그를 데리고 호프집을 나왔다. 그가 말했다.
'제 앞에서 절대 취하지 마세요.
여자가 취하는 거 진짜 없어 보여.
여자가 취하는 거 진짜 싫어.
여자가 취하면 아웃이에요 아웃'
이런 내로남불자세보소. 지금 취한 건 몸짱맨이십니다?
그를 차에 밀어 넣으며 대리운전을 불렀다.
'알아서 잘 가세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그는 왜 여자가 취하는 게 싫었을까?
전 여친의 주사가 너무 심했나?
여자가 취하면 걱정거리가 많아져서 그런가?
여자가 술을 마시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나?
조신하고 얌전한 조선시대 여자가 이상형인 건가?
그의 주사까지는 괜찮았다. 긴장하다 과하게 마시면, 그래. 같은 말 반복할 수도 있지.
하지만 '여자가 취하면 없어 보여. 내 앞에서 취하지 말아요'라니.
넓은 가슴은 개뿔 밴댕이 가슴도 못 되는 남자 같으니.
남친에게 차일까 봐 눈치를 보며 술을 마실걸 상상하니 너무나 끔찍했다.
호프집 점장님의 시그니처칵테일이 사람을 살렸다. 그 한 잔이 내게 구원주였구나.
집에서 혼술 하면서 티비보고 주사나 실컷 부리련다.
내 팔자에 남친은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