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곡도 Jun 11. 2024

니스, 이토록 아름다운 바다

L과 나는 니스 바다를 보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둘 다 바닷가의 도시에 살아서 바다를 징하게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아름다운 바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파스텔톤의 물빛 그라데이션이 완벽하게 적용된, 청명하고 파랗지만 그렇게 또 차갑지만은 않은, 한낮의 햇볕이 모든 파도에 반사되는 것 같은, 내가 갖다 붙일 수 있는 단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 반짝임이 자갈에 부딪히는 정갈한 파도소리까지. 바다의 이데아가 있다면 니스 바다일거라고 생각하며 우와 우와 감탄사만 연발하고 있었다.      

니스는 우리의 빡빡한 27일간의 5개국 여행에 매우 사치스러운 일정이었고, 특별히 유명한 곳이 없어서 그리 기대하지도 않았다. 유럽여행 카페에서 ‘참 이쁜 곳이에요 한번 가보세요’라는 말에 별다른 검색도 없이 계획표에 집어넣은 프랑스 남부 도시일 뿐이었다. 파리에서 사인해 달라고 몰려드는 집시와 지하철의 오줌냄새와 비싼 물가에 치여(10년 전 루브르 미술관의 카페에서 파는 콜라가격이 3000원가량이었으니!) 기차를 타고 내려온 이곳은 새로운 세상 그 자체였다.     

바다 앞에 우뚝 서 있는 관람차를 지나 이름도 이질적인 영국인의 산책로(프롬나드 데 장글로)를 따듯한 바람을 맞으며 쭉 걸으면서 이 길을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기부한 관대한 영국인들에게 대단히 감사하며 말로만 듣던 새파란 지중해를 만끽했다.      

그 때 우리는 사랑에, 사람에 치여있는 상처 입은 영혼이었다. L은 몇 년간 뜨겁게 사랑한 남자를 잊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고, 나는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에게 지쳐 한국을 떠나고만 싶었기에 이건 둘을 위한 힐링 여행이었던 것이다.      


그 찬란함을 바라보다 문득 ‘내가 살아 있는 건 이 바다를 보기 위해서였어’라고. 처음으로, 생을 긍정했다.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 내 오랜 화두 ‘왜 삶을 지속해야 할까’는 ‘언제 생을 끝내면 좋을까’로 가끔 변하기도 하고 ‘어떻게 떠나면 좋을까’로 구체화되기도 했다. 누군가가 어디에서 어떻게 되었다더라. 라는 말을 들으면 ‘나도 그렇게 가면 괜찮겠다’라는 먼저 간 사람에 대한 연민보다는 잘 떠나는 방법에 대한 생각이 어쩔 수 없이 앞섰다. 이건 무언가의 자극에 의해 압도되는,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감정 따위가 아니라 나의 온 시간 속에 디폴트값으로 저장된 물음이었다. 이런 나에게 니스 바다가 처음으로 다른 대답을 던져 준 것이다.      


‘어떻게든 살다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것도 볼 수 있는거야’ 라고.     

오~! 이 위대한 이 자연의 장대함과 웅장함, 경이로움 앞에서 눈물짓는 나, 그런 종류는 아니고 살다보면 이런 일도 한 번쯤은 있다는걸 니스 바다가 슬쩍 알려준 것이다. 내 화두에 정답은 없다는 듯이.     

그날 밤 우리는 호가든 로제라는 처음 보는 술을 사서(그때는 한국에 이 맛이 들어오기 전이었다.) 낡았지만 있을건 다 있었던 (특히 크루아상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인걸 알게 해줬던) 3성급 호텔에 들어와 삐걱이는 침대 위에서 달콤한 술을 홀짝 거리며 말했다.      

‘우리 오길 잘했다. 여기 진짜 좋아’ 라고.     


작년, 니스 방문 십 주년 기념의 해를 맞이하여, 다시 니스를 갔다. 경유지가 아니라, 하루 잠깐 보는게 아니라, 일주일 살이를 하기 위해서. 어느샌가 ‘어떻게 잘 살아야 할까’를 새로운 화두로 맞이한 나에게 찬란한 니스바다가 말했다. ‘이렇게 또 보면 된다’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된 L에게 우리 다음에는 같이 오자며 니스 사진을 보냈더니 ‘어느 세월에’라며 답이 왔다. 또 어느 세월에 같이 와서 우리 잘 살았네 하며, 호가든 로제를 마시며 바다를 보자. 봐도 봐도 좋은 이토록 아름다운 바다를.

매거진의 이전글 줄도화돔, 인간은 그렇게 안 되겠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