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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을, 우리

<월간 오글오글 : 2월호 추억>

by 곡도 Feb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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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글오글>은 글쓰기 모임 오글오글 작가들이 매 월 같은 주제로 발행하는 매거진입니다. 2월호 주제는 '추억'입니다.



위이이이잉.

석고를 다듬는 소리다. 그 방에서는 매캐한 먼지가 나는 것 같다. 숨을 참고 걷자.

치지지직.

용접하는 소리다. 저긴 피해 가야 한다. 내 발에 불이 붙을 수도 있다.

물감 냄새가 흩어진다. 색이 덕지덕지 묻은 알 수 없는 그림과 형체가 드러나기 전의 돌들이 놓여 있다.

그렇게 살금살금 미대 복도를 빠져나오면 샛노란 세상이 펼쳐진다.


은행나무다.


노란 은행잎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바닥에도 떨어진 잎이 수북하다. 잎과 함께 은행도 떨어져 있다. 코를 찌르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사람들은 은행 냄새가 똥 냄새 같다고 하지만, 똥 냄새와는 약간 다르다. 시큼하면서도 썩은 냄새에 흙내음이 묘하게 섞여 있어 이상하게 계속 맡고 싶어진다.


여기는 동아대학교 구덕캠퍼스다. 미대와 매점 건물 사이에 심어진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은행을 줍기 위해 왔다.


곧 준비된 장갑을 끼고 은행을 주워 마대자루에 넣는다. 신발에 은행이 박히지 않게 발끝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언니와 나, 그리고 아빠는 양질의 은행,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밟혀 터지지 않은 은행을 찾아 바닥을 훑는다.

어느 정도 마대를 채우고 나면 싸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출출해진 우리는 매점으로 걸어간다. 매점 앞에는 우유를 파는 자판기가 있다. 100원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졸졸졸 소리와 함께 달큰한 향이 나는 미색의 우유가 나온다. 혹시라도 빨리 꺼내면 손이 델까 봐 우유가 다 나왔는지 확인하고 신중하게 종이컵을 꺼낸다. 따뜻한 우유를 뽑아 들고 은행나무가 보이는 벤치에 앉는다. 차르르 바람이 분다. 은행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언니와 나는 노랗고 냄새나는 세상을 만끽하며 후루룩 우유를 마시고, 아빠는 마대자루에 담긴 은행을 정리한다. 집에 갈 준비가 끝났다.


며칠 동안 아빠의 술안주는 은행이다. 엄마가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켜고, 망 같은 팬에 은행을 굽는다. 소금을 살살 뿌린다. 톡톡 은행이 익으며 터지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집 안에 가득 퍼진다.

은행은 여러 개를 먹으면 안 된다고 엄마와 아빠가 몇 번이고 강조한다.

그러면 나와 언니는 겁을 내며 은행을 이쑤시개로 집어 하나씩 먹으며 숫자를 센다.


그렇게 가을밤이 또 하루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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