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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Mar 14. 2021

‘잘 늙는 방법’ 같은 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잖아

<0.5mm> 2013


일본 중부 기후현에 위치한 작은 마을 타카야마에 도착했다. 유명한 관광지도 아니고 이렇다 할 특산품도 없는 심심한 동네답게 평일 낮의 역 주변은 한산했다. ‘일본의 알프스’ 라는 별명답게 겨울에는 그래도 스키를 타러 오는 관광객들이 꽤 된다는데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길목이라 그런지 마을 풍경은 자판기 옆 공터에 드러누워 낮잠 자는 고양이들만큼이나 고요했다.


친구 녀석의 퇴근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카페에서 책이라도 보면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누가 시골 아니랄까 봐 스타벅스는커녕 엑셀시오르, 도토루 같은 대형 체인점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하나같이 동네 사람들 사랑방 같은 분위기의 작은 로컬 카페들이라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동네를 한참 거닐다 ‘카페(カフェ)’도 아니고 ‘찻집(喫茶)’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낡은 가게로 들어갔다. 어둑한 실내에는 조용하게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커플, 구석 자리엔 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읽는 할머니, TV 화면 속 경마에 한껏 집중하고 있는 할아버지 몇 분이 손님의 전부였다.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주인 할머니가 나를 반겼다. 카페 손님의 평균 연령을 한껏 낮춰주는 뉴페이스의 등장에 신이 나셨는지 경쾌하게 메뉴판을 건넸다. 이런 시골 카페에는 어떤 음료들이 있는지 혹 팬케이크나 나폴리탄처럼 간단히 요기할 거리라도 있을까 싶어 메뉴를 살폈다. 곧 내 입에서는 아주 작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메뉴라면 일본어 옆에 영어 정도는 적혀 있거나 제품 사진이라도 있는 게 접객의 기본일 텐데 이 가게의 모든 메뉴는 붓으로 한 자 한 자 휘갈겨 쓴 가타카나 일색이었다. 오랜만의 일본 방문이라 글자가 바로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과장을 약간 보태면 이런 느낌이랄까?


1. ホットトールフォーミーラテウィズキャラメルソース : ¥450

2. トールキャラメルスチーマーウィズホワイトモカシロップウィズエクストラホイップクリーム : ¥550

3. ショートデカフェノンファットミルクホワイトモカ : ¥480


당황해서 메뉴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뭐냐 이게 도대체, 캬… 캬라멜 스틱 화이트 모카 엑스트라 휘핑 뭐? 어버버…' 식은땀이 한 방울 또르르 떨어지는 순간, 내 왼쪽 반걸음 뒤에 다른 손님이 우뚝 서서 기다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일흔은 족히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입을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채 완고한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 말했다.


"아… 어르신, 먼저 주문하세요."

갑작스러운 내 양보에 할아버지는 잠시 놀라더니 이내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아닙니다. 제가 주문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같아서. 먼저 하시죠."

그러자 미간과 눈가, 콧잔등의 주름까지 한껏 찡그리는 무방비의 웃음을 내게 지어 보이며 그가 말했다.

"허허. 저는 시간이 아주 많아요. 그러니까 천천히 보시고 좋아하는 거로 주문하도록 해요."



뭐지? 이렇게 배려와 여유가 넘치는 할아버지를   인생 처음이다. 그동안 내게 노인이란 존재는 안하무인, 고성방가, 대뜸반말, 고집불통으로 대표되는 꼰대의 대명사일 뿐이었는데 이렇게 신사적인 어르신 존재하다니 정말 충격이다. 나도 이분처럼 답답한 외국인이 바로 앞에서 버벅거리는 꼴을 차분하게 기다려줄  있는 어른이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늙어가야 할까? 어떤 노인으로 변해갈지, 사려 깊은 할아버지가 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됐다. 정답을 찾아내기엔 너무 먼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미리미리 조기교육 받는 심정으로 지금부터 천천히 준비해야지 않을까. 그런데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에 빨리 주문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진짜 화내실라. “이, 이거, 2번 주세요 2번!”






일본에서는 '헬퍼 Helper' 라고 부른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돕는 활동 보조인들을. 노인 간병인으로 봐도 되고 호스피스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주인공 야마기시 사와는 씩씩한 여성 헬퍼다. 덩치는 크지만 제대로 몸도 못 가누는 할아버지들 목욕도 시켜주고 옷도 갈아입히며 배변 또한 능숙하게 처리한다.


우연한 사고에 휘말려 파견회사에서는 잘리고 모아놓은 돈까지 모두 잃어 망연자실하게 된 그녀. 별수 없이 회사에서 지정해주는 노인들을 케어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에게 먼저 접근해 막무가내로 그들의 생활을 돌봐주기 시작한다. 어찌 보면 좀 황당할 수도 있는 극단적인 상황들인데도 괴물 배우 안도 사쿠라의 빛나는 열연으로 모든 게 설득되는 따뜻하면서도 불편한 영화 <0.5mm>.



여주인공의 친언니인 안도 모모코 감독이 실제 간병인으로 일했던 경험을 고스란히 녹여서 만든 작품이라 그런지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3시간이 훌쩍 넘는 긴 러닝타임 안에 꾸역꾸역 녹아들어 있다. 등장하는 노인들은 저마다 이상하다. 하나같이 어쩜, 단 한 명도 정상적인 사람이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과연 정상적인 노인으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일까?


팔다리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데 사와를 욕망에 가득  눈으로 바라보는 노인은 비정상일까? 노인은 성욕을 가지면  될까? 노인은 무작정 참아야 하나?  살까지는 괜찮고  살부터는 주책인 걸까? 아들 부부가 자기 유산 때문에 하도 싸우는 바람에  나와 가출한 할아버지를 도와주느라 노래방에서 밤새 노래를 부르는 사와. 조금은 쌀쌀한 다음날 아침, 할아버지는 자기가 입고 있던 코트를 사와에게 벗어주며 애교 섞인 작별의 말을 건넨다. “  사와짱. 내가 죽을 때가 되면 헬퍼로 와줘혈육인 아들과 하룻밤 노래친구 사와 중에 누가  할아버지의 마음을 따뜻하게 덥혀줬을까.



그 다음, 남의 자전거 바퀴에 구멍이나 내고 다니는 심술쟁이 시게루 할아버지를 발견한 사와는 협박을 한다. 경찰에 신고하겠다. 그게 싫다면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집에 가서 식사를 하자. 어쩔 수 없이 허락한 노인의 홀로 사는 집에 쳐들어가 정성껏 요리하고 집 청소도 하며 헬퍼 업무에 돌입. 그러다 알게 된다. 할아버지는 유일하게 친구라고 생각하던 사이토씨에게 다단계 사기를 당하기 일보직전이다. 자동차 수리로 기름밥 먹어가면서 평생 모아놓은 전 재산 1억을 자기에게 투자하면 2배로 불려주겠다는 얄팍한 수.


사랑하는 부인이나 가족은커녕 말 한마디 나눌 동네 친구조차 없다.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는 옛날에 버림받아 찾아오지도 않는다. 이러니 사기를 치려는 사람조차 '소중한 친구' 라고 여길만 하다. 사기라도 좋다. 집에까지 찾아와 주고 카페에서 커피도 함께 마시며 전화도 걸어주는 존재. 내 재미없는 얘기를 눈앞에서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


사와: 이제 그만 인정해요. 아무리 봐도 야쿠자잖아요. 노인 상대로 투자하라면서 사기 치는 거라고요. 

시게루: 그만해. 난 이제 돈 같은 거 필요 없어. 사기당해도 괜찮다고. 사이토씨랑 계속 친구 사이로 지내고 싶을 뿐이야.

사와: 사기 쳐서 돈 빼앗아 가는 게 무슨 친구예요!



친구의 가면을 벗고 야쿠자의 본모습을 드러낸 사이토씨의 마수에서 할아버지를 구해내는 사와. 격한 몸싸움도 피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일하게 친구라고 여겼던 이에게 버림받은 그는 마음이 많이 무너졌는지 실버타운에 입소하기로 결심한다. 자기를 지켜준 고마운 사와에게 보물과도 같은 낡은 자동차를 한 대 선물로 남기면서.


계속되는 그녀의 여정. 이번에는 대형 몰에 있는 서점에서 책을 훔치려던 마카베 할아버지를 포착한다. 할아버지는 자기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할머니를 간병하며 단 둘이 살고 있다. 그때부터 사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사람을 돌본다. 할아버지는 특별히 할 일이 없어도 집 밖으로 나간다. 집에 있는 건 괴롭다. 사랑하는 부인이 자기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넋이 나간 걸 지켜보는 건 너무 아픈 일이다. 멀쑥한 정장을 차려입고 하루 종일 마트 의자에 앉아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다.



할아버지는 알고 있다. 해군 장교 출신으로 자존심 강한 자기의 정신도 요즘 들어 깜박깜박하고 있다는 걸. 때문에 할아버지는 끊임없이 종이에 뭔가를 적고 신문을 스크랩하거나 녹음기에 말을 남긴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함께 아내를 돌보고 따뜻한 밥을 나눠 먹으며 친해진 사와가 누군지조차 잊어버리고 만다. 안방에서 사와와 마주한 할아버지는 생경한 표정으로 첫인사를 다시 한다.


마카베: 안녕하세요. 출판사 일도 요즘 많이 힘드시죠? 그럼 이제 슬슬 취재 인터뷰를 시작해볼까요? 우선 부하 군인들을 교육시키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군함에 탄 상태로 공격을 당하기도 했지요. 훈련하면서 곧 진짜 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병사들에게 솔직하게 말하긴 힘들었지만요.

사와: 그렇군요. 해군에 계셨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배에 탔을 때는 어떤 기분이셨나요?

마카베: 지금 여기서 죽는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쟁처럼 바보 같은 짓도 없지요.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애석할 뿐이지요. 그때는 다 포기했으니까요. 지금이니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한심한 짓거리도 없습니다. 전쟁처럼 바보 같은 짓거리는 또 없어요. 진짜 싫은 일이에요 전쟁 따위… 그렇다고 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는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죽을 각오로 간 거였는데 말입니다. 미군들도 마찬가지 기분이었을 거예요. 정말 많이 죽었어요.

사와: 뭐가 가장 힘드셨어요?

마카베: 서로 죽인다는 거죠. 한심하죠 지금 생각하면. 죽은 사람들한테 미안할 뿐이에요. 괴롭히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그게 전쟁이니까요. 적들도 그럴 거예요.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인간이란 참 이상한 존재예요. 이제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면 안됩니다.

사와: 그러네요.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네요.



사와를 출판사 기자로 생각한 마카베 할아버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옛날 얘기를 한바탕 늘어놓는다. 말에 앞뒤도 없고 맥락도 없다. 똑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는 할아버지의 횡설수설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들어주며 때로는 조곤조곤 질문도 던진다. 그에게 전쟁이란 얼마나 큰 충격이고 아픔이었을까. 인생이 송두리째 뒤집히고 부정당하는 경험이었겠지. 치매에 뇌를 잠식당하고 있는 지금까지 그 날의 기억들은 사라지질 않는다.


하루가 다르게 정신이 멍해진다. 내가 온전한 나로 있을 수 없다는 건 어떤 것일까. 그럭저럭 숨은 쉬고 있지만 그걸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자기보다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부인을 보며 할아버지는 이제 곧 자기 차례가 다가옴을 느꼈을 거다. 회복될 희망도 없는 그녀를 매일같이 간병하며 지켜보는 것은 지옥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내 손으로 마무리를 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이처럼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통인 할아버지에게 사와는 아무런 편견 없이 진심으로 대한다. 도시락도 싸주고 끝말잇기도 하며 때로는 가만히 옆에 앉아 마당에 불어오는 봄바람을 함께 맞으며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렇게 사와는 마카베 할아버지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준다. 한 사람의 인간 대 인간으로.



하나같이 기구한 사연과 아픔을 온몸으로 지탱하며 살아가고 있는 노인들. 그런 노인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도 뚜벅뚜벅 나아가는 막무가내 간병인 사와의 로드무비. 우리는 그동안 주위에 있는 노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사와처럼 아무런 색안경도 끼지 않고 바라본 적이 있었나? 공원에서 트로트를 흥얼거리는 꼬부랑 할아버지에게 스스럼없이 말 걸고 장난치며 같이 밥 먹자고 해본 적이 있나?


박범신 선생님이 은교에서 말했듯 젊음은 상이 아니고 늙음은 벌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늙는다. 품격 있게 늙기 위한 연습도 해야 하고 조금 먼저 늙어버린 이들과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한 공부 또한 해야 한다. 영화 <0.5mm>의 포스터에 있는 문구. ‘死ぬまで生きよう、どうせだもん。죽을 때까지는 살아보자, 어쩔 수 없잖아’ 라는 말처럼 뭐 어쩌겠나. 어떻게든 같이 조화롭게 살아가야 하는 걸. 초고령화 사회인 일본의 어두운 현실을 세세한 필치로 정밀 묘사한 이 작품은 얼마 안 있어 우리에게도 곧 닥칠… 아니 사실은 이미 대한민국 여기저기서도 벌어지고 있는 세태를 고스란히 담은 문제작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한 편으론, 어디를 가든 심성이 잔뜩 비뚤어진 할아버지들만 어쩜 그리 쏙쏙 찾아내서 귀엽게 협박하고 어르고 달래며 케어하는지 안도 사쿠라의 능청스러우면서도 귀여운 몸짓에 눈을 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한 영화. ‘뭔가 사연 있어 보이는 여자’ 연기로는 세계 최고가 분명할 그녀의 열연에 박수를 보낸다.  


사와: 다 죽어가는 할아버지들을 상대하다 보면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들어. 내가 모르는 역사를 살아온 사람이 나랑 같은 세상에 살고 있구나. 전쟁 같은 거 난 모르니까. 오늘 태어난 아이도 내일 죽는 할아버지도 다 같이 살고 있잖아? 서로 간에 얼마 안 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거리를 좁혀가면서. 그렇게 마음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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