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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Jun 07. 2021

그대들과 함께한 모험이었기에

<빛의 아버지: 파이널판타지14> 2019


“와… 이렇게 다 모인 게 도대체 얼마만이냐?”

각자의 군대를 제대하고 20대 중반의 청년들이 되어 다시 만났다. 취업걱정, 연애고민, 졸업성적, 학자금대출 등 눈앞엔 암담한 현실뿐이었지만 모이면 뭐가 그리 좋은지 바보같이 웃고 떠드는 다섯 명이었다. 대학도 다 다르고 먼저 취업한 녀석, 휴학 중인 녀석, 곧 유학 떠날 녀석 등 처한 상황은 모두 달랐지만 중고등학생 때부터 친구인 우리는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즐거웠다.


주말마다 모여 술도 한 잔 하고 PC방에서 게임도 하면서 써도써도 끝없이 넘쳐흐를 것만 같은 청춘의 시간들을 함께했다. 그러던 중 한 녀석이 재밌는 게임이 나왔으니 같이 하자 꼬드겼고 그 게임이 바로 블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일명 ‘와우’ 라고 불리는 게임이었다. 그렇게 다섯 명은 PC방에 쪼르르 앉아 와우를 시작했다.


 폭풍이 몰아치는 설원에서 애완 곰을 앞세워 사냥에 나서는 드워프 사냥꾼의 박력 넘치는  모습부터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표범으로 변신해 질주하는 엘프, 지옥불정령을 소환한 언데드 흑마법사, 울퉁불퉁한 근육으로 포효하는 오크, 손에서 불을 내뿜는 인간 마법사몸만 컸지 사춘기 소년 시절과 다를  없는 정신상태의 소유자였던 우리는 칼과 마법, 정의와 배신이 소용돌이치는 와우 세상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기껏해야 스타크래프트나 카트라이더 같은 심심풀이 게임이나 하던 우리에게  작품은 녹록지 않았다. 복잡한 세계관과 불친절한 시스템으로 어딜 가서  하라는지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퀘스트가 수두룩했지만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깊고도 오묘한 판타지 월드의 매력에서 헤어 나올  없었다. PC방에서 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정액제 결제를 하고 매일  각자의 집에서 플레이하기에 이르렀다.


숲을 뛰어다니는 토끼를 때려잡고, 여우도 잡는다. 늑대와 순록을 잡아 가죽을 벗겨 상점에 팔아 돈을 마련한다.  돈으로 전사들은 칼과 방패를 사고 마법사는 새로운 마법을 배운다. 그렇게   며칠을 와우에 빠져서 허우적대던 우리는 처음으로 깊고 깊은 던전에 가보기로 결의했다. 스톰윈드 성에서 쫓겨난 석공과 광부들이 ‘데피아즈단이라는 이름의 반국가단체를 결성해 역적모의를 꾀하는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것이다. 서부몰락지대의 죽음의 폐광으로 향했다.


다 같이 모여 낄낄대며 들어갔지만 이제까지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탁 트인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동물이나 상대하던 것과는 달리 좁고 어두운 폐광의 통로는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손색이 없었다. 음산한 음악은 공포감을 더했고 조금만 길을 잘못 들어도 적들이 떼거리로 달려와 가차 없이 곡괭이를 휘둘러대는 통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이런  처음이다. 적이 너무 강했다. 아니면 우리가 너무 약했던 걸까. 고작   명의 적을 상대하면서도 우리 다섯은 낑낑댔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효율적인 역할 분담은커녕 어떻게 싸워야 할지도 모른  마구잡이로 달려들기만 했으니까. 그러다 전멸하재도전. 무모한 돌격을 이어간 끝에 폐광의 깊숙한 곳까지 도달해 마침내 강력해 보이는 거대한 보스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다들  신경을 집중하며 칼과 방패가 부딪히는 격전을 쳤다. 마법 공격을 담당한만큼 먼발치에 떨어져 보스에게 얼음화살을 발사하던 중 깜짝 놀랐다. 방심했다. 주변을 살피는 걸 잊고 보스에게만 집중한 거다.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다른 적들이  발견했고 이내 괴성을 지르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실수다. 엎친  덮친 격으로 달려오는 적들은 하필 정예병사들이어서  녀석들이 싸움판에 끼어들면 우린 분명 전멸이다. 고생고생하며 어떻게 여기까지  건데


잠시 고민했지만 곧바로 소리 높여 외쳤다.

미안하다 얘들아!!  때문에  달려온다. 아직 나밖에  본거 같으니까 내가 반대쪽으로 멀리 떨어져서 그냥 죽을게. 너희는 그냥 계속 싸워. 보스  잡아줘!”

얼음보호막을   반대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려면 최대한 멀리 가서 죽어야 한다. 칼과 곡괭이로 뚜드려 맞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순간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은 친구들과 가깝다.   멀리죽더라도 최대한 발을 묶어둬야 



그때였다.  뒤를 덮치던 정예병사들의 입에서 둔탁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뭔가 이상해 뒤를 돌아보자 친구 넷은 만신창이가  몸으로 정예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이미 다들 죽기 일보 직전이다. HP, MP, 기력, 분노모든 스테이터스가 쭉쭉 빠진 상태. 더군다나  멀리서는 보스마저 이쪽으로 향하고 있지 않은가.


,   없이 깨면 뭐하냐. 여기까지 왔는데같이 싸워야지.”

대수롭지 않게 내뱉으며 힘겹게 칼을 휘두르는 친구들을 보자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뭐지?  갑자기 울컥하지? 이건 그냥 온라인 게임일 뿐인데? 어른들이나 여자친구는 한심하다며 잔소리만 퍼붓는 부끄러운 취미활동 중인데  이렇게 가슴이 뭉클할까. 25년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겪는 신기한 감정이었다. 이게 뭘까. 우정? 동지애? 전우?


밥을 같이 먹고, 수업을 듣고, 축구를 하고, 영화를 보는 모든 것들은 ‘일상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즐거운 일상을 함께 공유했다. 그런데 와우라는 게임 안에서 처음으로 일상이 아닌 ‘모험이라는  떠났던 것이다. 무엇 하나 익숙하지 않은 낯선 세계로의 여행. 미지를 향한 도전. 안개언덕 저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 렵지만 서로 등을 맞대고 어깨를 두드리며  걸음씩 내디뎠다. 고난과 영광의 가시밭길을 함께 헤쳐 나가는 동안 평범한 일상에서는 쌓일  없는 무게의 신뢰와 우정이 두텁게 자리 잡혔다.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이르면 사람의 진심이 드러나는 .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나만 희생해도 되는데.  녀석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비싼 수리비를 버려가며,  시간 동안 공들인 수고를 홀라당 날릴 위험에도 아랑곳 않고  하나 버려둘  없다며 기어코 달려와 줬다. 이게 뭐라고. 고작 게임 나부랭이일 뿐인데. 눈앞이 조금 뿌얘졌지만 정신을 집중하고  손을 모아 마법 공격을 준비했다. 이제 내가 친구들을 구해야 한다. 뜨겁게 이글거리는 화염구가  안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수십 년의 회사원 생활을 은퇴하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 4인 가족의 가장으로 식구들을 위해 한 평생 일에만 매진했지만 그 때문인지 집에선 과묵하고 부인이나 아이들과도 살갑지 못하다. 이제 와서 어떻게 자녀들과 친해져야 하는지 방법조차 알 수 없어 홀로 식사하고 밤늦게까지 TV 앞에만 앉아 있는 아버지가 안쓰러운 아들 아키오는 고민 끝에 묘안을 하나 떠올린다. 자기가 매일같이 즐겨하는 온라인 게임 ‘파이널 판타지14’의 세계로 아버지를 초대해 함께 모험을 떠나보면 어떨까?


무뚝뚝한 아버지의 은퇴 선물로 준비한 플레이스테이션과 게임소프트. 처음엔 심드렁했지만 무료한 은퇴생활의 소일거리로 적당하다 생각했는지 자기의 캐릭터를 생성하고 온라인 세계 ‘에오르제아속으로 들어가 보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몰래 지켜보며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 그러나 물심양면으로 끌고 당겨주는 ‘온라인 효자아키오의 우여곡절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일본 영화 <빛의 아버지: 파이널판타지14>.



가족만큼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하면서도 실은 잘 모르는 관계가 또 있을까. 매일같이 보지만 도무지 잘 모르겠는 사람들. 아키오 또한 마찬가지다. 회사원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아직 어렵기만 하다. 언제나 완고하고 고집스럽게만 보이는 부친의 근엄한 모습. 그러나 온라인상에서 만난 아버지는 조금 달랐다.


처음에는 뒤뚱뒤뚱 움직이는 것조차 어색해하더니 얼마 안 있어 사냥, 낚시, 요리는 물론 레벨업도 척척 해낸다. 정체를 숨긴 채 자기를 도와주는 아들의 친구 신청도 받아주고 길드 사람들과도 잘 어울린다. 세상 과묵하던 아버지가 온라인에선 말도 많고 농담도 잘 건넨다. 신기할 지경이다. 팀원들과 함께 파티를 구성해 강한 적을 무찌르는 것마저 성공해낸다.



아들: 첫 번째 파티는 어땠나요?

아버지: 과장 하나도 없이 최고였습니다.

아들: 이 세계, 즐거우신가요?

아버지: 그럼요! (…) 기분이 이렇게나 상쾌해지다니. 게임이라고 우습게 봤는데 이런 기분을 느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이곳에선 앞으로도 내가 모르는 세계가 많이 펼쳐지겠죠. 수많은 만남과 우정. 앞으로 더 많이 감동하고 싶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길드 사람들과 즐거운 얘기는 물론 마음속 걱정거리도 나눈다. 아들의 회사 생활 고민은 경력에서 나온 아버지의 조언을 통해  해결되고, 딸의 남자친구 때문에 속상하다는 아버지의 고민은 아들과의 진솔한 대화 끝에 현명하게 풀린다. 게임 상이지만 누구보다도 믿고 신뢰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로 거듭난다. 소통의 방법을 잃어 어색하고 쑥스럽기만 하던 부자에게 온라인 게임은 더할 나위 없이 딱 좋은 매개체였던 거다.



극의 긴장감 넘치는 전개를 위해서일까, 아버지의 은퇴가 사실은 큰 병 때문이었음이 밝혀지고 그와 동시에 작중 최강의 적 보스 ‘트윈타니아’에게 도전하게 된다. 유튜브 공략을 보면서까지 열공하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있는 힘껏 돕는 아들. 그러나 병환으로 쓰러져버리는 아버지. 병원에서 탈출해 PC방으로 달려가 팀원들과 약속한 최종 결전에 임하려는 아버지. 지금이 게임이나 하고 있을 때냐며 당장 병원으로 가라 타박하려 하지만 너무나도 굳은 결의로 마지막 전투에 나서는 아버지의 투지에 감화된 8명의 동지들은 결국 숨 막히는 싸움에 돌입한다.


게임을 전혀 하지 않는 관객이 이런 마음을 이해할  있을까? 심심풀이 애들 장난, 그깟 모니터    마리 잡는  누가 알아준다고?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동료들과 함께 사선을 넘나들며 싸운다. 다치면 치료하고 위험에 빠지면 살린다.  사람이 죽을  같으면 대신 몸을 날려 무시무시한 적의 불길에 맞선다. 그렇게 임전무퇴의 사투 끝에 트윈타니아를 무찌르는  성공한다. 모두의 힘과 의지를 합해 이뤄낸 모험의 성과는 찬란하고도 눈부시다.



아버지: 이야기할 게 있습니다. 한동안 로그인을 못할 것 같습니다. 실은 제가 병에 걸려서요. 솔직히 괜찮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수술을 해야만 한다더군요.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 살아갈 의미조차 잃고 전 그저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게임을 하다 보니 오래전 아들과 함께 게임을 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서 마음이 굉장히 평온해졌습니다. 세상에는 아직도 즐거운 일이 많고 내가 있을 곳이 있다는 것도 알았지요. 드디어 병마와 싸워볼 용기를 찾았습니다. 강적 트윈타니아도 이겼으니까요!


모험이란 것이 사라진 현대사회. 가장이라는 무거운 책임감에 얽매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고리타분한 60대 아저씨. 즐겁거나 신날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던 그에게 다가온 <파이널 판타지14>는 경이로운 모험 그 자체였다. 칼과 마법, 동료들과 함께라면 어떤 난관이라도 용감하게 뛰어들 수 있는, 가슴 두근거리는 도전과 감동의 세계. 지금 이 순간에도 가방에 회복약을 챙겨 담으며 먼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온 세상 온라인 모험가들에게 고대신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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