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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Jul 19. 2021

당신의 상식과 나의 상식은 다르다


일본 친구들과 얘기하다 흥미로운 지점을 하나 발견한 적이 있다. 남자들에겐 해당이 없는데 여자들의 경우 ‘자기 이름이 바뀔 수도 있다’ 라는 걸 나이를 불문하고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姓)’ 말이다. 결혼을 하게 되면 자기의 성이 남편의 성씨로 바뀌게 된다는 걸 학생 때부터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 결혼까지 생각했지만 너무나 촌스런 성씨라서 결혼이 꺼려졌다거나, 자기 이름과의 조합이 영 안 맞아서 고민된다거나, 종이에다가 짝사랑하는 남자의 성과 자기의 이름을 붙여 써보며 망상에 빠져 얼굴이 빨개졌다는 등의 일화는 한국인으로서는 들어본 적도 없고 상상해본 적조차 없는 이야기였다. 지인인 일본인 여자는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해외여행을 엄청 자주 가잖아? 얼마 전에 여권 갱신 기간이 다가오더라고. 그런데 남자친구가 도무지 프러포즈를 할 생각이 없는 거야. 큰 맘먹고 10년짜리 새 여권을 만들었다가 1년쯤 후에 남자친구랑 결혼하게 되면 이름이 바뀌니까 다시 만들어야 하잖아? 여권발급 비용도 좀 비싸? 20만 원 가까이 되는데… 짜증이 나서 빨리 청혼하든가 아니면 헤어지자고 소리를 버럭 질렀지 뭐야 (웃음)”


그녀는 결혼을 하면서 여자의 이름이 바뀌는 것에 대해 ‘그때까지의 인간관계를 한 번쯤 재정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했다. 썩 내키지 않는 친구들이나 전 회사 동료,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바뀐 이름과 연락처를 통보하지 않음으로써 수고스럽지 않고 아주 자연스레 인연을 끊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 역설하는 그녀. 참으로 일본스러운 인간관계 정리법이 아닐 수 없다.


외국인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이런 게 참 많았다. 한 가지 사안에 대해 지극히 다른 견해의 충돌. 한국은 어떻게 음식 배달이 24시간 되냐며 그 배달원들의 근로 인권에 대해 의문을 표하던 유럽 친구들, 어차피 결국엔 다 들어갈 수 있는데 귀찮게 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냐며 질서나 규칙에 대해 아예 이해를 못하던 중국 친구들, 나라에서 충분한 장학금을 주는 거 아니냐면서 밤늦게까지 알바하는 한국 유학생들을 이해 못하겠다던 아랍 친구들. 모두 저마다의 상황이 다르다 보니 ‘상식’이라는 것 또한 서로 달랐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 또한 아주 잠시지만 서민을 벗어나 부유층의 삶, 상류사회의 상식을 아주 살짝 맛본 적이 있다. 몇 년 전, 오피스텔 계약기간이 끝나 다음 원룸으로 이사를 하게 됐는데 이 건물이 신축이었던지라 집주인은 잔금도 치르지 않은 나에게 호기롭게 문을 열어줬다. 이사, 도배, 청소, 인터넷 설치 뭐든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하라며 입주 전인데도 키를 내줬고 덕분에 한 달 남짓의 기간 동안 집이 두 채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암… 일이 늦게 끝나서 고단하네. 오늘은 영등포 집에서 잘까? 아니면 상암동 집에 가서 잘까?’

퇴근길,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흠칫 놀랐다. 아니 이 무슨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대사람? 이건 거의 뭐 기업 총수가 수행비서에게 “음… 오늘은 좀 피곤하니 성북동 별장으로 향하게” 이런 상황에나 어울리는 멘트잖아.


두 채의 집이 있다는 사실이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신림동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난 다음에는 가까운 영등포 집에 가서 잤고 주말에는 컴퓨터가 있는 상암동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 앞에서 “아유, 오늘은 어느 집에 가서 잘까나?” 같은 대사를 날렸다가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진 자들의 상식’을 체험할 수 있던 한 달이었다.


생각해보면 결국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석유가 펑펑 나와 학비나 세금 걱정 하나 없는 아랍 유학생의 기분을 한국의 근로장학생은 알 수가 없고, 차가 여러 대라 그날의 날씨와 기분에 따라 다른 컬러의 차를 타고 외출하는 부잣집 아들내미의 상식을 월급쟁이들은 평생 이해할 수 없다. 이제 와서 사과해버리면 모든 게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버리기에 끝까지 잘못 없다고 바득바득 우겨야만 하는 일본 정치인들의 상식 따위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그러던 게 이제는 더 좁혀져 같은 나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이 사람에게 제대로 접수되고 있는지조차 불확실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저마다의 상식이 넘실대다 부딪혀 만들어지는 몰상식의 세상. 이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현명하게 살아남을 수 있긴 할까. 어렵다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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