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성숙한 위로의 방법을 알고 싶은 마음
남을 위로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겠다.
상대의 상처에 다가가 괜찮냐며 밴드를 붙여줘야 할지,
자연스럽게 딱지가 생겨 앉도록 없던 일인 양 둬야 할지 말이다.
나는 항상 후자의 방법을 선택했다. 마음의 장벽이 무너져 버릴 듯 슬픈 때에는 작은 말의 조각도 칼날이 돼서 사람의 감정을 베어버리고, 상대의 말에 의심을 가지고 왜곡된 의도를 찾아낸다. 어줍지 않은 나의 한마디 말에 상대가 상처 받지 않았음 싶었고, 나의 말에 연연하며 에너지를 소비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닌 척, 아니 어쩌면 모른 척 해왔다. 그러다 문득 걱정이 들었다. 내가 배려라고 생각했던 서툰 무관심이 상대방에게 더 큰 상처로 느껴지진 않을까? 힘든 가운데 혼자라는 기분까지 던져준 것은 아닐까?
생각보다 나는 상황에 감정이입을 잘한다. 상대가 털어놓는 고민의 과정에 깊게 이입해 대화 도중 눈물이 가득 고인 적이 적지 않다. 내 모습에 덩달아 울컥해진 상대는 말을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하고 대화 화제를 돌려버린다. 이런 유난스러운 나의 행동이 덮어뒀던 상대의 상처를 괜히 들쑤시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 그래서 애써 상대의 고민에서 한 발짝 물러서려 했다. 좀 더 성숙한 방법으로 상대를 위로하고 싶지만 나에겐 너무 어렵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도 조심스럽다. 남의 고난과 역경의 과정을 내가 함부로 제단하고 조언하고 싶지 않다. ‘힘내’라는 말 또 얼마나 잔인한가.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내 마음속 가득 담긴 위로의 말을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까?
위로를 할 줄 모르니 위로받는 것도 나에겐 어렵다. 어렵게 털어놓은 나의 고민에 상대마저 힘들어 질까 노심초사한다. 서론을 꺼내 놓고선 본론은 다시 마음속에 숨기고 입을 닫는다. 내가 그러는 것처럼 내 고민을 들은 상대가 나의 고민에 동화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상대가 나의 고민에 해결책을 찾느라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게 된다면 나는 더욱 큰 마음의 짐이 생기고 말 것이다. 나의 고민에 내가 사랑하는 내 사람이 힘들어지게 두고 싶지 않다. 그저 그 사람 앞에 행복한 일들만 보여주고 싶은 나의 욕심일까?
삶의 어려움을 겪고,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상대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같이 있어주는 것뿐이다. 눈물이 나면 휴지를 챙겨주고 울다 지치면 물을 가져다주는 것이 고작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힘든 건 나에게 큰 아픔이라는 걸 전달하는 행동이 고작 같이 있어주는 것뿐이라는 게, 위로의 한마디마저 서툰 내가 더 미워지는 순간이다. 나는 힘듦의 주체가 나일 때보다 남일 때 보다 더 아프게 다가온다. 내가 손 쓸 수 없는 상황에 마음이 더욱 아릿해진다. 고생을 하고, 고난을 겪어도 내가 해야 마음이 편하다.
이렇게 고민의 글을 써내려 봐도 당신을 위로할 좀 더 성숙한 방법을 아직 모르겠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아프지 않았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