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옹 Sep 13. 2018

혁명 후의 카이로

2011년, 혁명이 끝난 직후의 카이로 이야기


2011년 2월 11일, 나는 카사블랑카의 유스호스텔에 묵는 중이었다. 호스텔 로비에는 아랍의 뉴스채널인 알 자지라가 항상 켜져 있었으나 알 수 없는 아랍어가 나오는 방송을 눈여겨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건 숙소에 묵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날, 오렌지가 잔뜩 든 검은 비닐봉투를 흔들거리며 로비에 들어섰을 때는 평소와 달리 TV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뉴스를 보는 그들의 표정은 짐짓 긴장한 듯 하기도 하고 밝은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 중 한명을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무바락이 사퇴했답니다. 이집트 혁명이 성공했어요.”



튀니지의 자스민 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아랍의 봄, 그 결실을 가장 먼저 맺은 것은 이집트였다. TV화면 속 열광하는 이집트 시민들이 카이로의 심장인 타흐릴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카이로, 나의 두번째 고향, 내가 가장 사랑한 도시, 내 여행 인생의 시발점. 그 강력한 향수를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까. 온갖 미사여구를 떠올려보다가 그런 화려한 말들이 카이로와는 어울리지 않음을 깨닫는다. 오히려 카이로의 불편함과 더러움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아무런 꾸밈없이, 카이로는 그런 도시이므로.


신호등 없는 도로를 가득 메운 차, 쉴 새 없이 빵빵거리는 경적소리, 차 사이를 비집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 매캐한 매연과 담배 연기, 빵굽는 냄새, 물담배 냄새, 진한 아랍식 차이의 향기, 길거리에 널브러진 음식물 쓰레기, 10분에 한번씩 달라붙는 호객꾼, 하루 다섯 번 온 도시에 울려퍼지는 아잔(코란송)의 소란스러움. 카이로는 그야말로 혼돈의 구렁텅이, 아니 혼돈 그 자체다. 이런 더럽고 시끄러운 도시의 어떤 점이 좋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손과 입가에 기름을 덕지덕지 묻히며 치킨을 먹을 때의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사람과 차와 자전거가 뒤섞인 흔한 카이로 풍경


우리가 생각하는 ‘문명화된 도시’의 규칙을 모두 무시하는 도시. 그 무질서함의 한가운데 서있으면 묘하게 편했다. 나 역시도 규칙이니 질서같은 문명을 벗어던지고 그들과 함께 섞여드는 순간이 짜릿했다. 그런 날것의 카이로가 좋아 종종 깊고 좁은 골목들을 헤맸다. 그 모든 골목골목들이 눈을 감고 그릴 수 있을 만큼 선연하다. 그러니 내가 카이로에 가는 것은 귀향이나 다름 없었다.


뉴스를 본 순간 다시 카이로에 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결국 두달 후, 나는 서아프리카 여행을 예정보다 일찍 끝내고 카이로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2년만의 귀향이었다.






2년만에 다시 찾은 카이로가 너무나도 고요해서 나는 무척 당황했다. 족히 20년은 굴러다녔을 것 같은 차가 빽빽한 도로와 시끄러운 경적소리는 그대로였지만 인도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한산했다. 혁명이 휩쓸고 간 지 두 달, 카이로의 길거리 위에는 관광객이 단 한명도 없었다. 고개를 사방으로 돌려봐도 외국인은 나 하나뿐이었다.


혁명 직후의 카이로는 몰라보게 한산해져 있었다


혁명 이전의 카이로는 거리를 메운 사람들의 반이 현지인, 반이 외국인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히잡을 둘러쓴 여인들과 나시티 한장에 반바지를 입고 제 몸통만한 배낭을 멘 여행자들이 뒤섞여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도시는 더욱 들끓었다. 넘쳐나는 볼거리와 즐길거리, 저렴한 물가가 여행객들을 반겼으며 더러움과 시끄러움과 호객꾼이 다시 그들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곳이었다. 2011년의 카이로에도 볼거리, 먹을거리, 더러움, 시끄러움은 여전했으나 그것을 영위할 여행자들이 없었다. 묘했다. 카이로는 그대로이면서 그대로가 아니었다.


관광산업으로 먹고 사는 도시에 여행자가 빠져나가자 도시 전체가 침체되었다. 한 모퉁이 돌 때마다 다섯군데씩 나타나는 여행사와 숙소와 기념품 가게들은 모두 개점휴업 상태였다. 외국인만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던 호객꾼들은 내게 관심조차 없었다. 하다못해 길에 돌아다니는 택시마저 줄어 교통체증이 예전같지 않았다. 가끔 현지인들과 대화를 하면 일이 없어 몇 달째 놀고 있다는 말을 꼭 들었다.


잠깐 사이 지나치게 바뀌어버린 고향 풍경에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낯선 것은 낮의 카이로 뿐이 아니었다.


어느 토요일 새벽, 곤히 자고 있던 나는 큰 파열음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테라스로 나가려 하자 언제 다가왔는지 숙소 주인 언니가 날 부드럽게 붙잡았다.



“괜찮아, 폭죽 소리야. 다시 자.”



물론 나는 그게 폭죽 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언니에게 이끌려 테라스에서 멀어지기 전 밖을 살짝 훔쳐 보았다. 맞은 편 건물의 옥상에서 사람들이 몸을 내밀고 타흐릴 광장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중에 다른 여행자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 날 새벽, 타흐릴 광장에는 몇 대의 탱크가 있었고 금요일의 기도회가 끝난 후 해산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경고성 발포를 했다고 한다. 혁명은 끝났으나 아직 안정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2011년의 카이로가 낯설고 위험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적어졌어도 고유의 혼란스러움은 여전했고 현지 사람들이 자아내는 활기는 예전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여행객이 빠져나간 틈새에서 카이로 본연의 것들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군고구마 장수가 연기가 풀풀 오르는 카트를 끌고 자동차인양 도로 위를 배회했으며 생선 장수는 간절한 고양이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서 생선을 손질했다. 그 옆에 당연히 여기가 내 자리라는 듯 모여있는 염소들의 모습은 황당하기까지 하다. 차 파는 할아버지는 카메라를 들어보이자 갑자기 멋진 포즈를 취하더니 사진을 보고 해맑게 웃었다. 방직시장의 좁은 골목 안은 현지인들끼리 싸우는 듯 놀이하는 듯 흥정하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그것들은 아주 옛날부터 카이로에 존재했을 풍경들이었다. 여행자의 장막에 가려졌던 것들이 조금 덜 조용하지만 제법 힘있게 빈 틈을 메꾸고 있었다.


가족이 함께 카트를 밀고 가는 모습이 정겹다
혁명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들은 똑같이 살아왔을 것이다
도대체 왜 여기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염소떼


저기서 만든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싶은 더러운 가게에서 뭔지도 모르고 이것저것 주문해 일단 입에 넣고 보는 나 역시 2년 전과 똑같았다. 내 그런 모습이 카이로의 틈을 메우는 데 1인분만큼 일조했으리라.


씻지도 않은 손으로 빵을 굽는 아이와 먹어도 되는 건지 의심스러운 생선구이
나는 잘도 그런 곳에서 모르는 음식을 시켜먹곤 했다


가난한 배낭여행자의 끼니를 책임져주던 3파운드짜리 피자빵집은 여전히 성업중이었다. 나는 추억을 한 조각 사들고 우물우물 씹으며 타흐릴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서랍장처럼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다. 찬찬히 광장을 둘러보는 와중에 낯선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한 사람이 길가에서 이집트 국기를 팔고 있었다. 예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길에서, 시장에서, 가게에서 만났던 현지인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관광객이 없어 밥줄이 뚝 끊겼다고 한숨을 쉬면서도 그들은 웃고 있었다. 이제 혁명이 성공했으니 곧 안정화되면 다시 일할 수 있을 거라며 웃을 때, 사람들의 얼굴은 앞날에 대한 희망보다 스스로 일궈낸 현재에 대한 자부심으로 빛이 났다. 관광객이 없어도 활기찬 것은 카이로 본래의 속성 때문만이 아니었다. 행복하고 당당한 카이로 시민들이 뿜어내는 에너지 덕분이었다.


카이로 공항에 걸려있던 문구 : 이집트 사람들은 지구에서 가장 위대한 이들이며 그들은 노벨 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 오스트리아 대통령 하인츠 피셔






혁명 후 7년, 카이로는 또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거리에는 관광객이 넘쳐날 것이고 귀를 막아도 피할 수 없는 호객 소리가 왕왕 울려댈 것이다. 그리고 군고구마 장수와 생선장수와 낡은 택시와 더러운 노점과 하늘을 찌를 듯 하루 다섯번 울리는 아잔이, 관광객이 있을 때에도 그랬고 없을 때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의 피자빵집은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룰 테고.


어떻게 바뀌었든 나는 또 똑같이 카이로를 사랑하리라. 고향에 대한 사랑과 향수는 쉬이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 순간에 멈춰있는 카이로가 아니라 시간 위를 달리는 카이로를 사랑하니까.


다시 카이로에 가고 싶다. 향수병이 도지는 모양이다.


다시 간다면, 가장 먼저 피자빵집으로 달려갈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르셀로나의 어느 아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