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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 달력을 씁니다

by 람티


냉동실 문 앞에 똥 달력이 붙어 있다. 부엌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장소를 기꺼이 내어주었다. 그달에 어울리는 식물이 그려진 고상한 달력인데 똥 싼 날을 기록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무사히 큰일을 치르면 부엌으로 총총 달려가 날짜 위에 쾌변 도장을 찍는다. 허리를 숙여 두 다리 사이로 얼굴을 내민 맹랑한 곰돌이 도장이다. 똥 모양의 도장을 찾기가 힘들어서 고른 것인데 오히려 너무 일차원적이지 않아서 맘에 든다. ‘여러분 나 오늘 똥 쌌어요!’하고 씩씩하게 자랑하는 곰돌이를 보면 혼자 피식거리게 된다. 달력에는 쾌변 도장을 찍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다. 심지어 생일도 없다. 오로지 똥에 대한 예의와 경외심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작년에는 똥 싼 날 위에 갈색 색연필로 하트를 그렸는데(쾌변과 가까울수록 큰 하트를 그렸다), 올해는 조금 더 정식으로 축하하고 싶어서 도장 형태로 바꾸었다. 본가에 살 땐 근사한 똥을 싸면 엄마에게 달려가 자랑하고는 했다. 근사한 똥이란 이틀 연속으로, 모양은 고구마이지만 감자에 가까운 색으로, 변기통 위에서 배를 쥐어짜지 않고 쑥 나올 때를 말한다. 이제는 "아이고 잘 됐다~"하고 손뼉 치며 함께 기뻐해주는 엄마가 같은 집에 없으니까 나라도 적당한 반응을 해주려고 노력한다. 촘촘한 똥 달력을 바라보며 허리에 손을 얹고 두 발을 살짝 벌려 자랑스러움을 표현한다. ‘으하하! 잘 싸고 살고 있군!’ 삼사일 연속으로 도장이 찍히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다. 잘 먹고 자고 싸기만 해도 충분했던 아기 때로 돌아간 듯 무서울 것이 없다.


부드럽고 시원하게 속을 비운 날에는 도장을 찍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싸다가 만 듯한 날에는 도장을 찍어도 될까 싶어서 멈칫하기도 한다. 이런 고민에 빠지지 않도록 똥의 상태와 크기에 따라 다양한 도장을 마련하고 싶다. 소품샵을 열심히 돌아다녀도 똥 도장은 안 팔던데 직접 그려서 주문 제작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대왕 고구마 도장과 새끼 고구마 도장 정도만 있어도 똥 기록이 더 즐거워질 수 있을 텐데. 나처럼 똥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면 선물로 건네고 싶다. 얼마나 뿌듯할까, 변비 동지에게 똥 도장을 전파하는 기쁨이란.


달력 기록에 소홀해지는 시기는 내 몸 상태를 살피는데 소홀한 때다. 스트레스를 푼다고 야식을 먹다가 유튜브를 보며 잠들고, 그다음 날 온몸은 퉁퉁 붓는 데다가 집 안은 난장판이 된다. 당연히 아랫배는 두둑하고 방귀 냄새도 지독해진다. 일상을 지켜주는 루틴과 내가 멀어지는 날들이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물이라도 마셔야지 하고 냉장고 앞으로 가면 요 며칠이 텅 비어있는 달력이 눈에 들어온다. 똥 달력이 내게 소리친다. ‘지금 너, 똥을 놓치고 살고 있어!’ 정신이 번뜩 든다. 따뜻한 물을 한 잔 가득 따라서 마시고, 먼저 빨래부터 돌리고 널브러진 집안과 몸을 살피기 시작한다.


똥달력을 쓰며 오랜 시간을 분석한 끝에 어떤 공간에서, 어떤 사람들과, 무엇을 하며 지낼 때 편하게 똥을 쌀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주말 아침은 골든타임이다. 고양이처럼 엎드린 자세로 집중해서 책이나 유튜브를 볼 때 가장 스무스하게 똥이 나온다. 변기 가득 비워낸 후에는 다시 침대로 가서 휴식시간을 갖는다. 무리 지어 모이는 회식엔 웬만하면 가지 않는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 둘러싸이면 얼마 남지 않은 똥 쌀 기운까지 빨린다. 두 세 명까지의 만남이 적당하다. 여행 숙소를 정할 땐 화장실이 깔끔해 보이는 곳 위주로 선택한다. 아무리 오션뷰여도, 방이 넓어도 화장실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없다면 말짱 꽝이다.


쾌변을 돕는 데이터가 꽤 많이 쌓였다. 일 년 넘게 달력에 똥 기록을 이어오며 마음 상태와 쾌변 사이의 어마어마한 상관관계를 포착했다. 똥이 잘 나오는 곳에서 몸과 마음이 가장 편안할 테니, 쾌변에 대해 궁리하다가 자아성찰까지 하게 된 셈이다. 일하는 시간 외에는 혼자 편안히 늘어지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지는 결론이 나왔다. 먼저 약속을 잡는 일은 흔하지 않고, 단체로 하는 배우는 운동은 그만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만나고 싶은 사람, 해보고 싶은 도전, 가보고 싶은 장소가 어딜까 고민하게 된다. 선택하고 집중한다. 몸이 긴장하고 화장실 가는 것도 시원치 않으면 조금씩 바꿔본다. 똥이 주는 신호 덕분에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가 편안한 곳과 사람을 찾아간다. 똥을 기록하며 나를 돌본다고 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릴까.


똥 달력의 효험을 느끼고 있기에 아마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쭉 냉동실 문 앞에 붙여놓을 예정이다. 올해는 식물 달력에 똥 도장을 찍어 거름을 주었으니 내년에는 돼지 그림이 가득한 달력에 똥 도장을 찍어 재물복을 불러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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